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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하정우 ‘구남’에게서 갓 빠져나왔어요

by eunic 2010. 12. 29.

‘구남’에게서 갓 빠져나왔어요

영화 ‘황해’ 배우 하정우

“연기는 앞장서는 게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는 것”

“상대방 연기, 배우끼리 얘기 안하는 민감한 부문”

임종업 기자


»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짧은 머리, 거뭇한 콧수염, 핏기 어린 퀭한 눈. 두 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두리번거리며 길을 건너는 걸음걸이에 불안감이 뚝뚝 흐른다. 나홍진 감독 연출의 <황해>에서 김윤석과 주연을 맡은 하정우(32·사진)의 몫은 살인범으로 몰린 밀입국 조선족 ‘구남’이다. 하정우는 사라지고 오로지 구남만 남은 연기가 소름 끼칠 정도다. <비스티 보이즈>에서 능글능글한 호스트, <국가대표>에서 친엄마를 찾아 한국에 온 스키점프 선수, <추격자>에서 사이코패스 살인마, 그리고 구남까지. 다양한 연기를 펼치며 매번 주목받는 하정우를 24일 서울 한 호텔에서 만났다.

-영화 속 거친 인상과 다르다.

“아마 ‘구남’에서 빠져나와서 그럴 거다. 최근에 비로소 하정우로 돌아왔다.”

-한달은 걸린 것 같다.

“맡은 역이 워낙 강했기도 하지만 작업 중 촬영장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정이 늘어지고 같이 합숙하면서 일상이 무너졌다. 영화에 집중하기는 편했지만 내 일상이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자도 움직이는 차나 비행기 안에서 자는 것처럼 불안한 느낌이었다.”

-어떻게 나왔나?

“생활을 단속하고 새로운 취미를 찾아보았다. 그게 무선조종 자동차와 헬리콥터였다.”

-반대로 몰입 때는 어떻게 했나?

“본래 서둘지 않는다. 하나둘 재미를 붙이면서 캐릭터를 받아들였다. 첫째가 마작이었다. 전혀 모르던 건데 틈만 나면 김윤석 선배와 했다. 실제 게임처럼 돈을 걸고 했다. 이제 고스톱처럼 자연스럽게 할 정도다.”

-그다음은?

“먹거리다. 양꼬치구이, 개장국밥, 찐빵, 고량주, 하얼빈 맥주 등. 입맛에도 맞더라. 그러면서 다큐를 보고 그들의 문화와 생활습관을 익혔다.”

-아내를 외지에 보내고 거액의 빚에 쫓기는 절박감은 또다른 문제인데….

“옌볜엔 흔한 일이다. 코리안 드림을 이룬 이도 있지만 대부분 상황이 안 좋더라. 어머니나 여동생 등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감정이입이다.”

-조선족이 돼 보니 달라지던가?

“들리지 않던 옌볜 사투리가 들리더라. 집에서 일하는 옌볜 아주머니와 친하기는 하지만 가정사까지 궁금하지 않았는데, 이번 영화를 하면서 궁금해졌다. 많은 얘기를 들었다. 식당에 가서도 조선족 억양이 들리면 다시 쳐다보게 된다.”

-남한을 보는 시각도 달라지던가?

“힘든 것 같다. 그것은 감독의 의도 부분이다. 영화 속 구남이 놓인 상황이 안 좋으니 좋게 볼 리는 없겠지만 하정우가 구남의 눈을 빌려 그런 생각에 이르기는 어렵다.”

-하정우는 이야기로, 김윤석은 영화적 재미로 역할을 나눈 것 같다.

“영화 구조가 그렇다. 배우는 시나리오를 보고 역할을 파악하면 그만이다. 배우들끼리는 생각보다 상대방 역할에 대해 얘기를 안한다. 민감한 부분이다.”

-시나리오를 척 보면 역할 구분이 보이나?

“어느 정도는 안다. 연극학을 전공하면서 셰익스피어를 집중 해부해본 게 큰 도움이 됐다. 사진에서 픽셀이 적은 것을 키우면 깨지지만 본디 큰 것을 축소하면 상관없지 않은가. 영화에서는 <대부>를 공부한 게 도움이 되었다.”

-김윤석처럼 개성이 강한 상대와 부닥치면 기죽지 않는가?

“그는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배우다. 함께 일하는 배우를 키우는 타입이다. 지금까지 좋은 선배들을 만나 함께 작업한 것은 정말 행운이다. 이른 나이에 이렇게 큰 영화 주연을 맡은 것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온 결과라고 본다.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할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된 것도 그렇다. 감사하다.”

-서로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나는 ‘이 신은 내가 따먹을 거야’ 하는 식의 태도를 가장 싫어한다. 그런 좁은 마음으로 임하면 좋지 않은 연기가 나오고 영화는 실패한다. 연기는 앞장서는 게 아니고 상대를 배려하고 리액션하면서 하나하나 쌓아올리는 거다.”

-나홍진, 김윤석, 하정우 셋이 짝짜꿍이 잘 맞는다.

“그러니까 연달아 두 작품을 한 것이다. <추격자>(2008)에서 일단 확인된 게 있으니 셋이라면 물건이 될 거라는 신뢰감이 있었다. 하지만 기대감이 더 클 것이니 열심히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성공했다고 보나?

“잘 모르겠다. 흥행으로 보면 길게 갈 것을 기대한다. 두번 보니 이제 알 것 같다는 사람들이 있더라. 영화를 제대로 소화하려면 한번 더 봐라. 분명히 더 큰 재미를 느낄 거다.”

-다음 작품은?

“<의뢰인>이다. 변호사 역할인데 처음으로 직업을 가졌다. 집도 있고 자동차도 있다(웃음).”

-지금까지 해온 것과 다른데….

“내가 꺼낸 카드는 적다. 아끼고 있는 게 많다.”

-그게 뭔가?

“나는 원래 코미디를 좋아한다. 내가 한 연극도 대부분 코미디였다. 영화에선 조금 더 성숙되고 담금질된 뒤 제대로 꺼냈으면 한다. <멋진 하루> <비스티 보이즈>에서 복선을 깔았고 이번 작품에도 조금 맛을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중 하나가 찰리 채플린이다. 동작과 표정으로 영화를 끝까지 끌어가는 게 감탄스럽다. 구남 연기도 비슷하다. 걸음걸이 모양과 속도, 표정 등에서 인물을 표현하려 했다. 그래서 두번 보아도 좋다는 얘기다.”

-바른생활 사나이 같다.

“젊은 날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한다. 운동, 그림그리기 등을 규칙적으로 한다. 배우의 생활패턴이 불규칙하고 불투명해서 중심을 잡아주는 게 있어야 한다. 그런 것 중 또다른 하나가 어려서부터 함께해온 사람들과 일관성 있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배우가 된 건 아버지(탤런트 김용건) 영향인가?

“피를 물려받았으니 아마 그럴 거다.”

-남 얘기 하듯 한다.

“겨드랑이 털이 언제 났는지 기억하는가. 못할 거다. <수사반장>, <전원일기> 보면서 자랐지만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한 순간은 언제인지 기억에 없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기사등록 : 2010-12-27 오후 09:02:53 기사수정 : 2010-12-28 오전 11: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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