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책 전장의 기억- 도미야마 이치로
정희진의 책읽기
<전장의 기억> 도미야마 이치로
일상이 전장화하는 현실
폭력에 맞선 저항은 가능한가?
아버지가 어머니를 구타하는 것을 목격한 아이,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지켜본 한반도, 동료의 시체 곁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전쟁 포로.
이들은 모두 ‘다음은 내 차례’라는 공포에 전율한다.
하지만 살아 있는 한, 인간은 절박한 순간에도 그에 맞는 저항/타협/적응/정체성을 준비한다.
이들은 폭력을 목격했기에 그 자체로 고통받은 피해자이자, 폭력을 말리지 못했다는 죄의식에 시달리는 힘없는 ‘방관자’다.
물론 아직은 죽지 않았으므로 저항할 가능성이 있다. 동시에 아버지나 미국이 되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못한 ‘가해자’이며,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새로운 약자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삶의 매순간이 역사이고 인간은 철저히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들은 바로 일상을 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주체’로서 인간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거리를 좁힌다.
나는 제주 4·3, 광주 5·18에 이름4·3 사건, 광주 사태, 항쟁, 민주화운동… 붙이기를 주저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두 사건을 한국적 인종주의인 지역주의에 기초한 제노사이드(인종 청소)라고 본다.
두 사건 공히 이승만 반공 정부, 5공화국이라는 친미 국가 탄생의 전초전으로 내부 식민지가 치러야 할 ‘예정된 의식’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이 문제에 대한 발전적 논의를 가로막는 두 가지 부정의가 있는데, 이는 특정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면서도 국민/민중의 이름으로 통합하는 근대 국민 국가의 이중성과 연결되어 있다.
진상(가해자)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피해자의 기억은 봉인되었다.
그러나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 피해자에게 ‘용서하라, 화해하라’고 강요하는 ‘우파적’ 방식이 그것이다.
다른 부정의는 지역 문제를 독자적인 사회적 모순으로 인정하지 않는 ‘좌파적’ 논의이다.
그들에게 계급 문제에 대한 각성은 ‘계급의식’이지만, 지역 억압에 대한 관심은 ‘지역감정’이다. 전자는 정치의 영역이지만 후자는 아니라는 정치 자체의 위계화이다.
위에 적은 두 가지. 폭력을 행하는 자와 당하는 자 사이의 긴장과 동일시의 동시적 가능성과 근대 국가 내부의 지역적(혹은 인종적/성적) 타자성은, 실상은 이분법에 근거한 제국주의 시대지만 문화다원주의로 포장된 지구화 시대에 우리가 직면한 문제이다.
자신의 타자성을 폭력에 저항할 가능성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면 저항의 과제를 피해자에게 미루지 않고 인식하는 자 바로 자기 내부에서 찾는다면, 전장은 전쟁의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폭력은 점점 일상을 위협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삶을 구성, 명명하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폭력과 전쟁이 일상 밖에서 별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전쟁에 동원되지 않는다. 개개인은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일상이 전장화하는 현실에서 폭력에 대한 저항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가 바로 실천의 시작임을 웅변하는 책.
나의 짧은 생각과 이 작은 지면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유의 깊이가 너무 아득해서 현기증을 일으키는 이 책은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郞)의 <전장의 기억>(임성모 옮김· 2002·이산)이다.
여성학 강사 정희진 /한겨레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