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욕망으로서 매져키즘 - [피아니스트]에게 1

eunic 2005. 2. 28. 18:25

여성주의 저널 <이프>에 게재 / 정희진
욕망으로서 매져키즘 - <피아니스트>에게

이런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새삼 대한민국에 이런 지면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안도한다.
이 작고 겸손한 매체조차 많은 여자들이 진땀 흘리고 흥분하고 모욕당해가며 얻어낸 것이리라.
이렇게 촌스런 말로 서두를 시작하는 것은 자기 검열로 떨고 있는 소심한 나를 자위(自衛)하기 위함이다.
며칠 전 어느 대학에 강연을 갔다. 이야기하다가 나도 모르게 "다시 태어난다면 두 가지 점에서 남자로 살고 싶다"고 했다.
하나는 (아무리 낮은 계급의 남자라도)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그 많은 자질구레한 진 빼는 노동으로부터 면제된다는 점, 그래서 그들은 '이성'적일 수 있고, 초월할 수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질문 시간에 어느 학생이 다시 물었으나 솔직하게 답하지 않았다.

쥬디스 버틀러는 "페미니즘이나 정신분석학이나 여성을 생물학적 사실로 전제했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본질주의"라는 다소 '과격한' 주장으로 보편주의자들을 불편하게 했지만 사실 그 말, 맞다.
"가부장제가 여성을 동일성에 가둔다면, 우리는 다양성으로 맞서겠다".
이제까지 여성 공통성의 대표적인 요소로 간주되었던 모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여자들의 경험은 동일하지 않다.
남자 시스템이 그들의 필요와 원하는 기능에 따라 "여자는 모두 본질적으로 '창녀'(어머니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같다"고 명명했을 뿐이다. 여자들은 같지 않다. 이러한 인식이 나의 숨통을 연다.

내가 취약해 보여서일까.
처음 만나는 여성들도 내게 비밀스런 이야기를 잘한다.
나는 쌔근 잠들어 있는 100일도 안 된 딸을 보고 묘한 (가학적)감정에 사로잡힌 적이 있는데, 내게 상담을 청한 어떤 여성이 그런 나의 무의식에 일격을 가했다.
"저는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보면 목 졸라 죽이고 싶어요. 선생님은 안 그러세요? 그 애가 나를 밖으로 못 나가게 하고 내 미래를 빼앗아갔잖아요?"
상상력이 있어야 현실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이 여성의 이야기가 모성의 현실일지도 모른다. 모든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아니며 아이를 낳은 모든 여성이 헌신과 희생(이것은 책임과 다르다)을 당연하게 수용하지 않듯, 모든 여성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섹스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의 젠더 극우주의자들이 우글거리는 한국사회의 정치적 검열과, 그 검열을 남자들의 기대 이상으로 초과 달성하려는 검열이 과잉 내면화된 이 땅의 여자들은 남자가 원하는 범주에서 벗어나는 자기 경험은 말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궤도를 이탈한 여자에게 어떠한 추방과 사회적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나혜석처럼 살고 싶되, 나혜석처럼 죽고 싶은 여자는 없는 것이다. 전경린의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변영주의 <밀애>)은 어떤 여자에게는 경고였다.

내 생각에 한국 사회는 동성(애자) 사회(homo social)다.
우리 사회의 남자는 게이이고 여자는 '레즈비언'이다. 남자들은 터치를 가장한 패싸움을 즐겨 벌인다.
그렇게 격렬히 만지고(싸우고) 나면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그들은 액션과 폭력과 터치의 구분이 없는 인류다. 남자는 자기들끼리 밀어주고 아껴주고 키워주고 자리를 대물림한다.
여자를 가운데 둔 삼각 관계에서도 지지고 볶고 질투로 진을 빼는 대신 협상하거나 친구가 되거나, 여자를 제물 삼아 함께 성장한다(보 비더버그의 <아름다운 청춘>이나 알폰소 쿠아론의 <이투마마>를 보라).
남자에게 여자와의 사랑은 남성 연대만큼 중요하지 않다.

반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레즈비언'이 되는 방식은 남성의 타자, 대리인으로서이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여성들은 몸만 '여자'지, 남자의 사고 방식을 머리에 이고 지고 그의 비위 맞추기를 일상 노동으로 삼으며 산다.
생각해 보라. 여자들이 '진짜' 이성애자라면, 남자의 벗은 몸을 보고 쾌락을 느껴야 하지 않나?
그러나 대부분의 이성애자 여자들에게 남자의 벗은 몸은 공포요, 폭력이다.
성기 노출이 성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은 여성이 그것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불쾌해하는지 그들이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이성애자이면서도 남자의 벗은 몸이 아니라 (남성의 시선으로)여자의 벗은 몸을 보고 성욕을 느낀다.
우리는 남자의 안경을 너무 오래 쓴 탓에 아예 남자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

사랑은 여자의 일이다. 사랑(관계)을 유지하기 위한 감정 노동, 육체 노동. 그 모든 비용은 여자의 몫이다.
여성이 그 일을 그만 두는 순간, 이기적인 여자라는 비난과 함께 대부분의 연애는 끝이 난다. 성별 사회에서 여자에게 사랑은 사회적 관계, 생존, 돈, 자아 실현, 성취 등 인생의 모든 것(everything)이기 쉽지만, 남자에게 사랑은 언제나 다시 올 버스, 여러 버스 중 한 대(a part)일 뿐이다.
남자가 사랑에 울고불고 할 때는 자기가 찬 것이 아니라 채였을 때, 즉 게임에 지고 거부당해 자존심이 다쳤을 때뿐이다.
닐 세다카의 You mean everything to me? 김소월의 진달래? 그들은 남자지만, 여성 화자로 말한다. 반면 여자 작가가 남성 화자로 말하는 작품은 별로 없다.
남자는 두 영역을 모두 오갈 수 있지만 여자는 그럴 수 없다.

이런 세상을 상상해 본다. ......
남자에게도 사랑이 관계, 생존, 돈, 자아 실현, 인생의 목표여야 한다.
남자들도 친밀감에 목숨을 걸고 관계 유지를 위해 생의 모든 자기 가능성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여자의 출세를 위해 헌신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성폭행 당한 후 그녀가 결혼을 거부하자 자살한다.
여자는 배, 남자는 항구가 되어 남자도 여자를 기다리다 지쳐 썩어 문드러져 돌이 된다...
사랑과 친밀감, 섹슈얼리티의 정치경제학에 혁명이 오기 전까지는 그 어떤 남자들의 혁명도 부분적이거나 자기 만족일 뿐이며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여성이 자기 몸을 소유하는 것은 노동자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그것은 인류의 가장 거대한 타자성(他者性)이 일소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