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함, 낙원과 지옥 사이
2007년 2월 2일 제646호
▣ 권김현영 홍익대 강사
2005년에 강간 사건은 5년 전보다 68% 증가했고, 밤길을 두려워하는 여성은 69%이다. 통계청이 ‘무서워하는 여성’을 위한 시장이 형성돼가고 있다고 보고할 정도이다. 강간과 살인 등 강력 범죄에 대한 여성의 공포를 시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너무 비열한 수작이지만, 이런 공포에도 불구하고 혼자 사는 여성들이 여전히 많은 것은 흥미롭다. 2004년 기준으로 혼자 사는 여성 독신 가구는 175만 가구이다. 2005년 한 경제지의 조사에 따르면 독신을 원하는 여성은 전체의 87%에 달한다고 한다. 독신을 원하지만 선택하지 않는 이유로는 38%가 외로움에 대한 공포를 들었다지만, 독신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90% 이상이 경제적 자립을 꼽았다. 안정적인 파트너를 꼽은 경우는 3%에 불과했다.
그 속에서 자아가 사라질까 두려워
경제적 자립과 정서적 외로움이 양립하기 어려운 문제라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여성주의 심리 상담가인 미리암 그린스펀은 독립적이고 자아존중감이 강한 여성일수록 친밀함 속에서 자아가 사라질까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정체성은 아내나 어머니, 딸과 같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여성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독립적으로 생각할수록 기존 여성 정체성과의 갈등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여성들은 직업적 성공을 위해 사적인 관계의 달콤함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론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 간의 친밀한 관계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경험하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무서워’하게 된다.(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이 80%에 육박하고, 결혼한 부부 중 30%가 아내 구타를 경험하고 있으며, 20대 여성 279명 가운데 36.9%가 데이트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보고도 있다.)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에 대해 사법기관이 개입하지 않으려 했던 관행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이것이 상식으로 통용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좀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것이 상식이었다는 것은 연인과 가족 등 기존 친밀한 관계의 본질에 폭력이 스며들어 있다는 걸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여자를 때리는 남자를 말린 적이 종종 있는데, 그럴 때면 둘이 ‘부부’거나 ‘연인’이라며 남녀 할 것 없이 제3자 개입에 분노하면서 나를 쫓아내서 황망한 적이 있다. 부부나 연인이라는 관계 안에는 애초에 둘 사이의 육체적인 경계가 없다는 개념이 숨어 있는 것이다. ‘내 것’이라거나 ‘자기’라는 말에는 상대를 자기 자신의 확장으로 생각하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무간도, 경계가 없는 지옥
여성학자 정희진은 영화 <무간도>의 의미를 재해석하며, 경계가 없는 것이 바로 지옥이라고 했다. 수년간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다가 친구까지 전 남자친구의 폭행으로 상해를 입자 고소를 한 A씨(27살)는 상담 중에 “사랑이 이렇게 지옥 같은 건 줄 몰랐다”며 눈물을 쏟아냈다. 나와 너 사이에 경계가 사라지는 경험은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일이다. 법적 정의도 사회윤리도 모두 진공 상태인 둘만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낙원이기도 하지만, 상대에 따라 내 삶의 질이 총체적으로 결정되는 지옥이 되기도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약속하고 있는 제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친밀한 관계 안에 배태되어 있는 부정의와 비윤리성에 마음 깊이 끌리는 것을 자주 봤고, 때로는 나 역시 그렇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외로움을 불러일으킨다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은 고독을 불러온다. 나는 어디에도 ‘올인’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인정하면서, 친밀함이라는 폭력과 외로움이라는 공포 사이에 고독이라는 경계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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