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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행복운동가 권복기 기자

by eunic 2005. 2. 24.


신문과 방송 기자 재발견 (8)

행복운동가 권복기 한겨레 혁신추진단 기자

<2002.10 : 382호 : 33-37>


함께 행복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

1993년 가을 어느 날의 일이다. 한겨레신문사 공채 6기 모집 2차 시험을 치르던 나는 시험감독한테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시험을 치르는 분들 가운데 한분이 오늘 결혼을 한답니다. 결혼식 시각에 맞춰 가기 위해 여러분들보다 현장 취재 뒤 기사작성 시험을 한시간 남짓 먼저 치르도록 했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입사 시험 날 결혼식이라니…. 어쨌거나 '권복기'는 최종 합격자 명단에 들어 있었고, 나 또한 억세게 좋은 운 덕에 지금껏 그와 함께 한겨레의 기자로 일하고 있다.

육아휴직이 가장 이채로운 경력

그가 처음 기자생활을 시작한 곳은 한겨레신문사가 아니었다. 한 중앙일간지의 사회부 초년 기자로 일하던 그는, 1991년 5월 어느 날, 사표를 던져버렸다. 강경대 군등 이땅의 참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던져 독재권력에 맞서 싸우는 와중에, 시인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을 멈추라'는 폭탄선언으로 민주주의를 꿈꾸던 많은 이들의 등에 비수를 꽂았던, 강기훈씨가 '타인의 자살을 선동한 악마의 영혼을 지닌 사람'으로 매도당했던 이른바 '유서대필사건'이 세상을 뒤흔들던, 한없이 슬프고 불행했던, '잔인한 5월'이었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는 내게 말했다. '문득 내가 민주주의의 적진에서 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표를 냈다.'
그는 '피가 뜨거운 사람'이다. 옳다고 믿으면 바로 행동에 옮긴다. 난 길은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걷다가 돌아보면 뒤에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 점에서 그는 새길을 내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삶에서 가장 이채로운 경력'으로 꼽는 한달동안의 육아휴직은 대표적이다. 그는 2000년 5월 육아휴직을 실행한 한국 최초의 남자 기자다. 이 문제에 대해선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게 좋겠다.

"위원장님, 저 육아휴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편집위원장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안사람의 육아휴직이 다음주면 끝나는데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제가 6개월 정도 휴직을 하려구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비교적 진보적인 분위기의 직장이긴 하지만 남자직원의 육아휴직은 처음이었다.
안식월 제도가 시작되어 가뜩이나 편집국 인력이 부족한 마당에 육아휴직을 하겠다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위원장은 "휴직을 한다면 엄마가 하는 것이 아이를 위해서도 좋은 게 아닌가요?"라고 완곡하게 반대했다. 결국 인사위원회까지 소집돼 1개월의 휴직이 결정됐다.
막상 짐을 쌀 때 마음이 착잡했다. 아이가 인생의 훼방꾼이란 생각도 했다. …여섯 살짜리와 생후 두 달짜리 딸을 키우는 전업 주부(主夫) 생활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서래(첫째 딸)를 깨워서 밥 먹이고 옷 입혀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면 지해(둘째이자 막내 딸)가 잠든 틈을 타 집안 일을 해야 했다.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를 돌린다. 물도 끓여야 하고 젖병도 씻어서 소독하고 똥이 묻은 기저귀는 손빨래를 해야 했다.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옷 잘 차려입고 우아하게 아이 안고 있는 엄마는 현실에 없다. 손에는 물 마를 때가 없고 씻을 시간이 없어 머리와 얼굴은 엉망이다. 남자들은 아이 문제로 아내와 싸울 때 ' 집에서 놀면서 애도 제대로 못 보냐'고 호통을 친다. 놀면서 애를 봐? 한번 해보시라. 감히 말하건대 아내들이 존경스러워질 거다. 집안일이란 게 계획대로 진행되는 게 아니다. 아이가 잠든 틈을 타 다른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일은 동시에 벌어진다. 아이는 깨어나서 목청이 터져라 울어대지, 세탁기에 섬유유연제 넣을 때는 됐지, 압력밥솥은 칙칙거리지, 거기다 전화벨까지 울리면 반쯤 넋이 나간다
(권복기, '기저귀 빨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경상도 아빠'중에서, '아빠 뭐해?', if펴냄).

아이들을 위해 시골로 이사
▲경기도 광주시 실촌면의 그의 집앞에서. 그는 행복하게 살려고 애쓴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처럼 ?내일 행복하게 살기 위해 오늘 참는? 삶이 아니라, 바로 오늘 행복하기 위해 애쓰며 산다. 여기엔 남다른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가 한 말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간추리면 이렇다. 현대는 행복을 유보시키는 사회다. 고교생에게는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참으라고 하고 대학생에게는 좋은 직장을 잡을 때까지, 취직해서는 승진을 위해, 또는 아이들이 대학 졸업하고 취직할 때까지 조금만 조금만 더 참고 견디라고 한다. 내일 행복해지기 위해 오늘을 참으라는 말을 평생토록 듣는다.
내 삶을 돌아봐도 그렇다. …행복은 유보될 수 없는 것이다. 확실치도 않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하늘이 내려준 눈앞의 시간을 불행하게 보내라고 강요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가. 나는 아이들이 오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내일은 오늘이 된다. 내일도 행복하고 모레도 행복하고…그러다보면 우리 아이의 인생이 행복하지 않겠나. 다만 이런 말은 꼭 해주고 싶다. 나만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모두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한 거야. 모두가 행복해지는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단다.…"
그의 가족은 2000년 늦가을 경기도 광주시 실촌면의 시골 마을로 이사했다. 그는 이태째 출퇴근에만 5시간 남짓 걸리는 고단한(?) 생활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다시 그의 글을 인용한다.
아이들에게는 돈보다 자연이 필요했다. …시골은 사계절이 다 좋다. 봄이면 냉이, 쑥을 뜯고 오디와 진달래로 술도 담근다. 여름에는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고 텃밭에서 기른 신선한 푸성귀로 쌈을 싸 먹는다. 가을에는 밤을 줍고 고구마도 캐고, 겨울에는 눈사람도 만들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아내와 나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눈길을 걸으며 행복해 했다. 달이 휘영청 밝은 밤, 서래는 친구들과 마당에서 밤늦도록 논다. 숨바꼭질도 하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도 한다. 비가 와도 괜찮다. 마루가 넓어 아이들이 몰려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깔깔대고 뒹굴어도 소란스럽다고 인터폰을 울리는 이웃이 없다. 학원을 가지 않아도 서래에게는 볼이 빨간 시골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친구나 친척들은 또 아이들 교육문제를 걱정한다. 아이들을 그렇게 '방목'하면 대학은 어떻게 가냐고. 명문대 졸업장만으로 행복이 보장된다면 모를까,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밀어 넣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기계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한번 돌아 보라. 모든 아이들이 비슷한 교육을 받고 자란다. 피아노, 미술, 컴퓨터, 영어 등등. 스파르타도 우리처럼 획일적인 교육을 했을까. …획일적인 교육은 아이들의 창의성을 억누른다.
어떤 친구는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부모를 원망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되물었다.
그렇다면 도시에서 하루에 서너 가지 과외 학원으로 내모는 너의 방식은 아이들이 선택한 거냐고. 나는 믿는다. 서래와 지해가 대학에 갈 때가 되면 학벌 중심 사회도 바뀌고 우리 딸들처럼 '자연스럽게' 자란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문도 넓어질 것이라고.
나는 아이들에게 산지식을 주고 싶다. 대학에 들어가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고 신문사 기자로 남이 못 보는 것들을 접하면서 한없이 오만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내 머리에 든 지식 가운데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낡은 것이라고 무시했던 어머니의 지식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였다.
나는 많이 배웠다고는 하나 나무나 풀을 구별할 줄도 모르고 어떤 작물을 언제 어떻게 심어야 할지, 옷을 어떻게 만드는지, 집은 어떻게 짓는지 모른다. 남이 생산해준 것을 사서 먹고, 입고, 쓰면서 자본주의의 부품으로 살아온 삶을 아이들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나는 서래와 지해가 매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갖기 바란다. 오늘도 행복하고 내일도 행복하다면 인생은 행복한 것이 된다는 게 나의 믿음이다(앞의 글).
그는 부자를 꿈꾸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세상을 본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자에겐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언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가능한 한 같은 높이에 서 있도록 노력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기자들의 월급이 '서민 수준'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살만한 세상, 좀더 민주적이고 공공성이 강한 세상을 일궈나가는데 무관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그의 말이 재미있다.
"아이들 교육을 생각하면 대책이 없지만, 모든 기자들이 우리(한겨레 기자)처럼 월급 받으면 교육, 의료 등에 대한 사회보장을 위해 미친 듯이 기사를 써댈 걸"(경력 10년차인 한겨레 기자의 연봉은 2,500만원을 조금 넘는다)

생명운동에 적극
그는 사회활동에 적극적이다. '세상과 내가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참여연대, 전국귀농운동본부, 사단법인 한살림, 한밝음생명사랑회의 회원이다. 귀농운동본부 정책위원이고 한살림 부설 <모심과 살림 연구소> 연구위원이며 월간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편집위원이다.
그리고 사이버 전태일 노동대학과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의 발기인이기도 하다. 눈치챘겠지만, 그는 '생명운동'에 관심이 많고, 깊이 개입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가 꿈꾸어 온 공산주의적 인간형을 바로 생명운동가에게서 발견했다."
그는 한겨레신문사에서 10년 가까이 기자로 지내고 있지만, 기사를 쓰는 일보다는 다른 일을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가 기자로서 자질이 부족하거나 기자생활에 애정이 없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특종을 많이 하기로 유명했던 전형적인 민완기자다.
그는 '진보언론 한겨레'에 걸맞은 생존전략을 찾는 일, 즉 지면의 진보적 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한겨레를 둘러싼 진보진영을 한겨레와 주요 독자가 함께 벌이는 진보적인, 대안적인 사업의 고객으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것, 그리하여 한겨레가 대기업의 광고에 수입의 대부분을 의존하는 모순적 상황을 벗어날 길을 찾겠다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사가 진보적 생존전략을 모색하기 위해 꾸렸던 수많은 사내 조직, 예컨대 한겨레발전위원회, 21세기발전기획단, 혁신추진단 등에는 그의 이름이 꼭 끼이어 있었다. 그는 지금 혁신추진단의 일원으로 새 길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당연하게도 노동조합 활동에도 열심이다.

함께 하는 삶
그래서 나는 늘 그가 고맙고 또 그한테 미안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에게 몇가지 물었을 때, 그가 내게 알려준 부르더호프 공동체 사람들이 부른다는 노랫말로 글을 맺어야겠다.

누구도 혼자가 아니에요.
누구도 혼자일 순 없어요.
모든 이의 기쁨은 나의 기쁨,
모든 이의 눈물은 나의 눈물.
난 지킬 거예요.
모든 사람을 나의 형제처럼,
모든 사람을 나의 친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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