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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김혜리의 카페 뤼미에르 / 우니 르콩트 감독의 <여행자>

by eunic 2009. 11. 4.

‘버려진 기억’ 가슴 뒤척이는…

김혜리의 카페 뤼미에르 /


영화는 행복에 겨운 소녀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아빠의 자전거 안장 앞에 앉은 소녀는 공기의 달콤함을 맛보려는 듯 조그만 입을 한껏 벌린다. 새 옷과 구두를 산 부녀는 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간다. 아빠 잔에 소주를 찰랑찰랑 따른 아이는 자기도 달라고 조른다. 남자는 순순히 어린 딸의 잔을 채운다. “아빠, 내가 노래 하나 불러줄까?” 소녀는 혜은이의 한스런 연가를 읊조린다. 당신은 모르실 거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세월이 흘러가면은 그때서 뉘우칠 거야. 그러다가 소녀와 관객은, 거의 동시에, 사내의 침묵이 너무 탁하고 무거움을 깨닫는다. 그날 밤 소녀는 등지고 누워 잠든 아빠 뒤에서 반짝 눈을 뜬다. 애인의 임박한 배신을 예감하는 여인처럼.


우니 르콩트 감독의 <여행자>는 아홉 살 진희(김새론)가 아버지에 의해 가톨릭계 고아원에 맡겨져 프랑스로 입양되기까지의 시간을 묘사한다. 르콩트 감독은 33년 전 극 중 진희와 같은 나이에 서울 근교 보육원에 들어갔고 1년 후 양부모를 만났다. 그러나 <여행자>는 자전적 수기의 자격으로 우리에게 호소하지 않는다. 여기 내가 지나온 역경을 들여다보라고 소매를 끌지 않는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어린이를 향한 보편적 연민도 <여행자>가 일으키는 감정의 전부는 아니다. <여행자>는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고아’를 흔들어 깨운다. 진희는 처음엔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그다음에는 버림받아 마땅한 자신의 결함과 죄를 찾아 기억을 뒤적거린다. 인형에게 가학적 분풀이를 하기도 하고, 다친 새를 보살펴 위안을 얻기도 한다. 영화 속 진희의 정신적 여정은, 사랑이 연루된 인간관계에서 먼저 버림받거나 외면당한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걸어보았던 추운 길이다.


진희에게 고아원의 삶이 가혹한 건 학대하는 어른이 있어서가 아니다. 원장을 비롯한 고아원 어른들은 공명정대하다. 가족을 기억하는 진희는 바로 그 차별 없는 공평함에 고통을 느낀다. 사랑은 ‘불공평하게’ 나 홀로 쬘 수 있는 화롯불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진희는 자기를 특별히 여기는 시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태에 저항한다. 끼니를 굶고, 높은 담을 기어오르고, 어스름이 내리도록 수풀에 숨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소녀의 세상은 철저히 공평하다. 담에 오르면 대문을 열어주고, 해가 저물어도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는다. 허기를 이기지 못한 소녀는 한밤중 부엌에서 밥알을 씹으며 비로소 운다. 인생은 더 이상 떨어질 데가 없다고 믿는 순간 바닥을 허물곤 한다. 친구 숙희(박도연)가 혼자 입양되어 떠나자 진희는 두 번째 버려진다. 세상과 싸울 기력을 잃은 소녀는 대신 자신을 없앨 요량으로 구덩이를 파서 제 몸을 묻는다. 얼마 후 진희가 얼굴을 덮었던 흙을 털어내고 다시 숨을 토하는 장면은 <여행자>에서 가장 슬프고 엄정한 순간이다. 소녀는, 살기로 결심한다. 그는 알아버렸다. 사랑 없는 생이란 그런 것임을. 밥을 굶진 않으나, 한 번도 배불리 먹지 못하는 한 줌의 허기를 감수하는 일임을.


김혜리 <씨네 21> 편집위원


기사등록 : 2009-11-01 오후 09: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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