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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독학자

by eunic 2005. 2. 24.
배수아 “초기 소설·독자와 결별”
[한겨레 2004-08-27 18:18]

[한겨레] 새 장편소설 '독학자' 펴내 감성 앞세운 몽환적 분위기 탈피
세상에 각광받는 문체에 저항하 듯
일부러 길고 복잡한 문장 구사
배수아(39)씨의 새 장편소설 <독학자>가 열림원에서 나왔다.

배수아 소설은 확실히 변하고 있다. 1993년에 단편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으로 등단한 이래 그의 초기 소설들은 서사보다는 이미지, 논리보다는 감성을 앞세우며 몽환적이다 못해 괴기스럽기까지 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평론가 백지연씨는 그런 배수아 소설의 성격을 ‘텔레비전 키드’라는 용어로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지난해에 내놓은 두 장편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과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이어 이번의 <독학자>까지를 읽어 보면, ‘이 배수아가 그 배수아가 맞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차이와 변화는 작품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가령 이번 작품 <독학자>의 경우에는 소설 첫머리에 등장하는 ‘긴 문장’이라는 말에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한 사람의 독학자의 탄생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에서 진짜 주제는 차라리 ‘긴 문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작가는 길고 복잡한 문장을 부러 구사한다. 짧고 쉬우며 친절한, 세상에서 각광받는 문체에 대한 이토록 명백한 저항은 대학과 체제, 유행에 반기를 든 주인공 독학자의 태도와도 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의 내용인즉,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80년대 중반에 대학에 입학한 주인공 ‘나’가 학교 분위기에 환멸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자퇴하고 독학자의 길로 나선다는 것이다. 그와 비슷한 고민을 나누는 친구 S와의 교우는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서사적 육체를 이루는데, 일종의 ‘영혼의 짝’(soul mate)이라 할 S조차도 그의 선택을 말리지 못할 정도로 주인공의 환멸은 심각하고 단호하다.

주인공이 느끼는 환멸의 많은 부분이 학생운동으로 대표되는 80년대 대학가의 경직된 분위기 때문이라는 설정은 이 소설이 제기하는 주요한 쟁점의 하나이다. 가령 이러하다.

“주정뱅이들은 팸플릿 앵무새가 되고, 단지 스무 가지의 단어만 가지고도 스무 시간에 걸친 토론에서 너끈히 승리를 거두어내며,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참가한 모든 전투마다 영광스럽게도 매번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혁명의 돌격대가 되었다.”(118쪽) “악을 무찌른다는 핑계로 또 다른 악을 만들어내고 있는 전투적인 무지함이 다른 것도 아닌 예술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기세등등해 있는 몰골들이다.”(61쪽) 주인공과 작가의 냉소적 관찰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독학자의 길을 택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그런 문제의식이 배경으로서 동원되어야 했는가 하는 소설 내적 질문,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그 시절에 대한 비판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소설 바깥의 질문이 함께 제기될 법한 것이다.


소설 출간을 계기로 오랜만에 만난 작가는 “나의 초기 소설 및 그 독자들과 결별하고자 한다”고 선언했다. 2001년 여름 처음 독일로 건너간 이후 독일과 한국을 오가면서 생활하고 있는 그는 최근 문단의 이런저런 모임에 아예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다. 그런 그를 두고 어떤 동료 작가는 ‘신비주의 아니냐’고 농 삼아 말하기도 했다. 그 자신은 “술을 못 하는데, 만나면 다들 술만 마시라고 한다”고 자신의 ‘대인기피증’을 설명했다. 그는 지금 소설 속 독학자가 목표했던 대로 오로지 읽고 쓰는 행위로만 이루어진, 단순하지만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