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명품관

이것이 날개다 / 문인수

by eunic 2009. 1. 23.

이것이 날개다 / 문인수

뇌성마비 중증 지체. 언어장애인 마흔 두살 라정식 씨가 죽었다.

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친구들 여남은 명뿐이다.

이들의 평균 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양 턱없이 짧다.

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

점심식사 중이다.

떠먹여 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 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0%·$&*%ㅒ#@!$#*? (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 주실거죠?)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뜨렸다.

$#·&@\·%,*&#……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 왔다, 싶은 모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 창공이다.

- 시집 <배꼽>, 창비

문인수 / 1945년 경북 성주 출생. 1985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뿔』 『홰치는 산』 『동강의 높은 새』 『쉬!』『배꼽』, 미당문학상 대구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노작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등 수상.

==================================================

옷이나 가방을 살 때는 "아, 저거다!" 하고 협상도 안하고 가격 묻고 돈 쥐어주고 나오는 편인데, 책은 몇년이 지났건만 다 읽어야만 사게 된다. 잘못 산 옷은 잠옷이나 츄리닝으로 변신이 되지만, 잘못 산 책은 정말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오기 때문이다. 은희경 이름만 믿고 산 "비밀과 거짓말"이 꽂혀있는 걸 볼 때마다 손이 뒷목으로 자연스레 간다. 그래서 주말에 교회 끝나고 종로 교보문고에 가서 하루종일 대여섯 권을 속독으로 읽고 온다. 읽고 온 다음에 인터넷으로 가장 싼 가격을 검색해서 사곤 했는데, 이 시집 <배꼽>을 읽는 순간, 눈물이 흘렀다.

'명품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일 없이 산다’  (0) 2009.04.07
서경식 칼럼/ 홀로코스트, 팔레스타인 그리고 조선  (0) 2009.03.16
책임을 맡기고 싶지 않다  (0) 2008.12.24
사랑을 믿다  (0) 2008.10.07
텅빈 듯한 대지의 충만함  (0) 2007.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