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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사랑을 믿다

by eunic 2008. 10. 7.

사랑을 잃는 것이 모든 것을 잃는 것처럼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때가 있다.

온 인류가 그런 일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손쉽게 극복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른 채 늙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드물게는. 상상하기도 끔찍하지만, 죽을 때까지 그런 경험만 반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삶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종종 실연의 유대감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에는 내가 떠나든 그들이 떠나든

둘 중 한쪽은 어느 별인가로 떠났으면 좋겠다 싶은,

참으로 호감이 가지 않는 인간형들이 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우연히

그들 중 누군가가 얼마 전에 지독한 실연을 당했다는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자,

나는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같은 하늘을 이고 살기조차 싫었던 그 인간을

내 집에 데려와 술을 대접하고 같은 천장 아래 재울 수도 있다.

심지어 술 냄새를 풍기는 그 인간의 입술에 부디 슬픈 꿈일랑 꾸지 말라고

굿나잇 키스까지 해줄 용의가 있다.

허기의 유대나 가난의 유대 같은 것이 있고,

시험강박의 유대, 채식주의의 유대,

실종 자녀를 둔 부모들의 유대 등이 있을 수 있다.

내가 별난 인간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실연의 유대만큼 대책 없이 축축하고 뒤끝 없이 아리따운 유대를 상상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건 아닌데 너무 초라하고 하찮아서

디 한번 보자 하고 덤벼들 마음이 생기지 않는 그런 것들 있잖아.

그런 보잘것없는 것들이 네 주위에 널려 있거든.

대상이든, 일이든, 남아 있는 그것들에 집중해.

집중이 안 되면 마지못해서라도

감정이 그쪽으로 흐르도록 아주 미세한 각도를 만들어주라고.

네 마음의 메인보드를 살짝만 기울여주라고.

그녀가 편안하다면 나로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누구를 만나도 가슴이 설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자신에게 가슴이 설레길 원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녀는 사랑의 고통으로부터 너무 먼 어딘가로 초월해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훨씬 더 관대하고 자연스러워졌지만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은 나를 슬프게 했다.

자신의 소유물을 하나하나 점검하여 나로부터 그것을 하나하나 빼앗는 식의

무력한 산수에 골몰했던 스물아홉의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사랑을 잃는 것이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사랑을 믿다 / 권여선 / 이상문학상 2008 대상

'사랑을 믿다'가 그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정교과서에 실렸으면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국정교과서의 권위를 높이 사는 건 아니지만 전국 중고교 학생이 한번은 읽게 될 테니까...

평범한 이야기가 문학의 위치로 올라서는 게 이런 것이란 걸 알게 해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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