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삶과 문화/
서경식 칼럼고백
먼저, 고백해 둘 것이 있다. 나는 교실에서 똥을 싼 적이 있다. 소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독일에 장기 체류 중이던 올 여름, 한 달 넘게 계속되는 강연에 지친 데다 시차와 기후.음식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바람에 배탈이 났다. 배탈이 났다고 해서 원고 마감 날짜를 뒤로 미뤄주는 법은 없다. 아픈 배를 부여안고 컴퓨터로 원고를 보냈다. 그 김에 내게 온 e-메일 수신함을 살펴봤더니 낯선 이름의 발신자가 보낸 게 한 통 섞여 있었다. U군이었다.
내가 어릴 적 다녔던 소학교는 일본 교토의 가난한 지역에 있었다. 거의 모든 학생이 가난했다. 한 반에서 대학 진학자는 서너 명. U군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졸업 후 43년 만에, 그것도 머나먼 독일 땅에서 예상치 못한 메일을 받은 것이다.
그가 보낸 메일은 동창회 통지였다. 나의 근무처 홈페이지에서 e-메일 주소를 찾았다고 한다. 메일은 "혹시 당신은 동창생 ○○씨가 아닌지요"라는 조심스러운 글로 시작됐다. ○○라는 이름은 우리 가족이 당시 사용한 일본식 이름이었다. 중학교 진학 이후 계속 지금의 본명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누군가 갑자기 "○○씨입니까?"라고 물어오면 먼 옛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과 맞닥뜨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덩달아 또 하나의 '옛 비밀'이 뇌리에 스쳤다. 마침 배탈이 나서 더 그랬다.
때는 소학교 2학년 산수 시간. 갑자기변의(便意)를 느꼈다. 손을 들고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만 하면 될 일이었지만, 어린 나로서는 그러지 못했다. 수업이 끝나기까지 참아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수업 종료 5분 전, 드디어 한계 상황에 다다랐다. 칠판을 노려보며 조이고 조였던 항문괄약근을 살짝 풀고 대변을 몸 밖으로 밀어냈을 때의 해방감이란. 하지만 곧바로 파국이 찾아왔다. 항문을 빠져나오기 시작한 대변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내 의지와 관계없이 계속 나오는 것이 아닌가. 긴 뱀은 안쪽 허벅지를 타고 드디어 반바지 끝으로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수업 종료 시각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화장실에 가 팬티 속의 묵직한 것을 변기에 버렸다. 그러나 이는 뱀의 몸뚱아리에 불과했다. 교실에 돌아와 보니 내 의자 위에 뱀 머리가 한 덩어리 남아있는 것 아닌가. 같은 반 여자 아이들이 "꺅. 지독한 냄새"라며 난리법석이었다. '똥싸개'라는 낙인이 찍힌다면 이후 학교 생활은 줄곧 왕따를 당해야 할 것이다.
"누가 내 의자에 똥 쌌어?" 어떻게든 이 상황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여자 아이들은 곧바로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야"라며 놀려대기 시작했다. 소동을 보고 있던 담임 N 선생님이 다가왔다.
"선생님 보세요. 내가 없는 사이에 누가 내 의자에 똥을 쌌어요…." 나는 또 거짓말을 했다. 누가 들어도 단박에 거짓말이라고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나이 50이 넘은 여성이었는데, 내가 그리 따르던 분은 아니었다. 그뿐인가. 한여름 체육시간, 땀에 화장이 흘러내린 모습을 보고 "떡칠 화장 할망구"라고 뒤에서 흉을 보기도 했다. 그런 선생님이 뭐라고 하실까. 심하게 혼을 내시는 건 아닐까.
다음 순간, 선생님은 숨을 죽이고 있던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게 말이야. 나쁜 아이가 있었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선생님은 눈 깜짝할 사이에 똥을 치우더니 나를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을 향해 "자, 빨리 자리로 돌아가. 수업 시작한다"라고 외치셨다.
만일 그때 N 선생님이 나의 거짓말을 질책했다면, 나의 소학교 생활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인생 자체가 지금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하찮은 일이 아이에게는 생명을 위협할 만큼의 상처가 된다.
어른이 되면 상처만 남고, 그 상처의 원인은 잊어버리게 된다.
상처를 껴안은 채 한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내가 이런 '과거의 비밀'을 고백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기나긴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현대법학
정리=박소영 기자 2006.09.2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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