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듯한 대지의 충만함
[매거진 Esc] :나의 도시 이야기/ 디자인하우스 진용주 편집장의 울란바토르
울란바토르는 사막이나 초원, 몽골의 모든 곳을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곳이다. 일종의 허브다.
그러니까 주체/주어로서의 ‘나’에 소유격 조사 ‘~의’가 붙은, ‘나의 도시’라니, 이 얼마나 부당한 대접일 것인가. 그 수많은 도시들을, 그 공간에 담긴 나의 시간과 기억들을,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고르고 골라, 도시 이야기 하나로 줄여낸단 말인가. 하여 고른 것은 기억이 아닌, 달콤쌉싸름한 시간의 좌표들이 아닌, 아직 당도하지 않은 시간들이 출발할 도시로 낙착되었다. 어불성설일까? 아니, 아니.
그 도시의 이름은 울란바토르이다. 이번 여름 잠시의 인연을 맺은 곳. 오문고비, 그러니까 남쪽 고비의 거대한 모래산 홍고린엘스로 가는 길, 울란바토르에 들렀다. 내가 그 도시에서 한 것은 사소하고 시시했다. 밥을 먹었고, 관광지들을 둘러봤고, 한가한 대학가 근처 카페에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맥주를 마시고 노트북으로 일을 했다. 아, 서울로 메일을 보내기 위해 한밤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를 한 시간여 헤매기도 했었지.
그런데 왜? 그건 이 도시가 나의 남은 날들의 허브(hub)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전이라면 남은 날들을 보내고 싶은 곳이 있냐는 물음 앞에서, 한참을 우물거렸을 것이다. 지금은 주저하지 않는다. 그곳은 몽골이다. 사람의 인연만 벼락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9일의 여정 동안 느꼈다. 아니, 오문고비에서의 첫날 저녁, 챠브강칭 샹드라는, ‘할머니의 우물’이라는 지혜로운 이름을 가진 한 언덕에서 그만 알아버리고 말았다. 이곳이 내가 사랑할 곳이구나, 이곳이 내가 살고 싶은 곳이구나.
그래서 여정은 축복이었고 은총이었다. 내가 살고 싶은 곳의 속살들을 대면하는 순간들이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까. 그곳에서 내가 만난 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었다. 세상의 모든 바람, 세상의 모든 햇빛, 세상의 모든 빗방울, 세상의 모든 언덕, 세상의 모든 초원, 세상의 모든 별들, 세상의 모든 꽃들, 세상의 모든 건조함과 세상의 모든 밝음과 세상의 모든 어둠, 그리고 세상의 모든 웃음. 텅 빈 것처럼 보이는 대지 위에 그렇게 세상의 모든 충만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에 돌아와 씻고, 밥 먹고, 그 다음 서점에 나가 몽골어 회화 책을 샀다. 그러곤 그곳에서 사온 커다란 펼침 지도와 두툼한 지도책을 활짝 펴놓고 다음의 여정을 상상했다. 내 인생의 남은 모든 여름은 몽골을 여행할 것이니 느긋해도 되련만, 조바심은 그 상상을 바로 계획으로 만든다. 내년 여름은 몽골의 극서 지역으로 이미 정해졌다. 올기로 들어가 울란곰으로 나오는 일정. 그곳으로 가기 위해 울란바토르를 거쳐야 한다. 내후년, 또, 그 다음 다음, 언제라도 그렇게 계속 울란바토르를 거칠 것이다. 어쩌면 이번 겨울,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서 비로소 숨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홉스골 호수 행을 지를지도 모를 일이고.
그때도 어김없이 울란바토르를 경유할 것이다. 몽골의 구석구석, 거기 아직 당도하지 않은 나의 기쁨들이 있을 것이고, 그 기쁨들과 만나기 위해서는 울란바토르를 거쳐야 한다. 행복의 경유지, 그것이 울란바토르에 대한 ‘나의 도시 이야기’이다.
글·사진 진용주/디자인하우스 편집장
기사등록 : 2007-09-12 오후 05:31:35ⓒ 한겨레 (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 나도 tv에서 봤을 때 몽골을 본 느낌이 꼭 이랬는데, 누군가도 나와 똑같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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