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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밀양

by eunic 2007. 7. 3.

바람구두 사이트에서 퍼옴

누미 이창동 - 밀양 용서란 가능한가

‘밀양’을 보고 왔다. 칸의 여인으로 등극한 전도연의 연기를 보고싶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는 이창동 감독이 이 영화에서 다룬 ‘용서’의 방식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청준의 ‘벌레이야기’가 영화 원작이라는 이창독 감독의 인터뷰 기사도 보았지만 친일과 보안법과 광주를 거쳐온 우리사회의 특성상 용서와 단죄는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은 선택의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이창동 감독은 그러나 이런 거창한 대상이 아니라 한 여자의 고통스러운 삶을 통해 용서의 방식을 다루고 있다. 아니, 용서의 가능성을 묻고있다.

영화는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에 신애가 어린 아들과 함께 내려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는 사람이 없는 그곳에서 신애는 카센터 사장인 종찬을 알게되고 썩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이런저런 도움을 받는다. 피아노학원 운영에 도움이 될까해서 엄마들을 모시고 노래방에도 가고 아들아이 학원에도 쫓아다니면서 그럭저럭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가는가 싶던 차에 아들이 유괴된다. 그 아들은 곧 시체가 되어 돌아온다. 범인은 땅을 좀 사두려고 한다는 신애의 말에 돈이 엄청 많을 거라 여긴 아이의 웅변학원 원장이다. 남은 건 이제 이 지독히 재수없고 불행한 여자, 신애가 겪게될 고통이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건 여기서부터다. 남편에 이어 외아들을 잃은 여자, 신애가 겪어내는 끔찍하고 지독한 고통의 기록인 이 영화 ‘밀양’은 용서에 대한 참으로 오래된 질문을 핵심에 놓고있다.

고통은 인간의 몫, 용서는 신의 몫?

나중에 유괴의 빌미가 될, 좋은 땅이 있으면 사두려 한다는 식으로 신애가 허풍을 떤 건 불쌍한 과부라는 꼬리표를 달고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어서였다. 생전에 자신을 배반했던 남편이 죽고 보상금으로 받은 돈도 사업빚 갚는 데 다 써버렸지만, 신애는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여 남편고향에서 살고 싶어 하는 것으로 자신을 위장했다.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남들 눈에 비쳐지고 싶은 모습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식이었다.

아이가 죽은 후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신의 존재에 눈을 뜨게 되고, 신의 품 안에서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고 신애가 자신을 몰아가는 건 제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고통스런 현실을 부정해 버리고 싶은 몸부림에 다름 아니었다. 신에 대한 믿음에 의지해 고통을 부정하고 마침내 아이를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노라 선언한 것 역시 그녀가 오만해서가 아니었다. 주님의 사랑으로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속였지만 신애는 사실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한 현실 속에서 한 치도 비켜날 수 없었다. 아닌 척해도 고통은 여전했다. 성경의 말씀을 빈틈없이 좇는다면, 그래서 자식 죽인 원수를 용서하게 된다면, 자신을 짓누르는 그 지독한 고통에서 어쩌면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고싶었을 것이다.

자식 죽인 범인을 용서하는 게 성자나 할 일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냐는 종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애는 교도소로 면회를 간다. 거기서 신애는 이미 자신의 용서를 필요치 않는 범인을 만난다. 신애와 마주앉은 범인은 주님이 사랑으로 죄를 사해주시고 용서해주셨노라고, 그래서 자신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평화를 얻었노라고 말한다. 과속으로 달리는 자동차처럼 위태해 보이던 신애의 믿음은 신이 행한 배신에 얼어붙고 경악하고 절망한다. 그대로 혼절했던 신애는 신에 대해, 세상에 대해, 자신의 고통에 대해 분노하고 증오하며 파행을 저지른다.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지독한 고통을 안겨준 다른 인간의 죄를 어찌 감히 신이라 하여 멋대로 용서할 수 있느냐고 절규한다.

영화는 고통과 용서에 대한 신애의 물음을 관객 개개인에게 던지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정신병원 치료를 받고 퇴원하던 길에 신애는 미용보조로 일하는 범인의 딸과 대면하는데 자책감을 드러내는 딸을 뿌리치고 미용실을 뛰쳐나온다. 그리고 신애가 제 머리를 직접 자르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난다. 고통을 당할 대로 당한 신애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견뎌낼지 아무런 언질도 던져주지 않은 채, 다만 신애 앞에는 여전히 종찬이 있을 뿐이다. 비록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지만 잠시도 신애 곁을 떠나지 않고 고통을 같이했던 종찬이 신애가 머리를 자르기 편하도록 거울을 들고 서있는 장면을 비추는가 싶던 카메라는 옆으로 슬쩍 비켜나 마당 한켠에서 멈춘다. 특별할 것 없는 지방 소도시의, 아무 특징없는 집 마당 한쪽에 조용하고 따뜻하게 고여있는 햇살을 잠시 붙들고 있던 카메라가 꺼지면서 그들의 모습은 사라진다.

고통은 남지만,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울려고 아주 작정하고 간 탓도 있지만) 내리 눈물을 쏟아선지 영화가 끝나고 또 엔딩 크레딧도 다 올라가고 나서도 나는 자리에서 쉬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내심 용서에 대한 감독의 결론을 짚어보자 벼르고 쫓아온 걸음이라 허탈해서만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너 혹시 피해망상증 아니냐는 소리도 들어본 적 있는 만큼 나는 용서라는 행위가 도대체 인간의 영역도 덕목도 아니라는 걸 일찌감치 확신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분명한 건 삶에 대한 태도와 함께 기대의 변화까지 요구한다는 점에서 용서란 결국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 때문에 두 주연배우의 연기에 힘입은 바도 있지만 신의 의지를 빌려서까지 애쓰고 버티다 결국 고통에 못이겨 쓰러진 신애의 모습에 오버랩되는 기억과 함께 밀려오던 전율은 분명 이 영화가 지닌 힘이었다. 아, 대단한 이창동 감독!

조조상영에 맞추어 달려온 영화관을 나오자 현기증이 일 정도로 눈이 부셨다. 지나치게 밝고 적나라하게 환한 한낮의 해운대 신시가지로 선뜻 걸어들어 갈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이던 중에 머리를 스친 생각이 그거였다. 일테면 내 주변에도 종찬과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달랐을까 하는. 까칠한 성질머리에 학을 떼면서도 그게 살아오며 입은 상처 때문이려니 짐작하여 넘어가주는 사람, 술에 취해 토해놓는 이야기를 수굿이 다 듣고도 그까짓 것에 무어 그리 한을 품느냐고 이해못해 갑갑해 하지만 그 때문에 여전히 그리고 지독히 아플 수도 있다는 걸 그냥 믿어주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 그리고 제발이지 이제는 내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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