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 사회자가 내 소개를 하면서 참 건강하다고 말했는데 아마 나의 건장한 몸에 관심을 갖고 말한 것 같다. 나는 지금 가마가사키의 노숙자촌에서 일용직 노동자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일용직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일을 마치고 그들과 함께 대중탕에 가서 목욕을 하고, 식사도 노동자들이 주로 끼니를 해결하는 식당에서 함께했다. 그들과 같은 입장에서 바라보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겉보기에는 다른 일용직 노동자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겉모습은 같아졌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 분노, 슬픔에 대해서는 그들의 발끝에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상대의 입장이 되면 그들을 알 수 있다는 것은 그저 명분에 불과했다. 그들과 내가 같은 생활수준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사람과 같은 입장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나를 낮추어야 함을 알았다. 스스로 상대와 같은 입장이라 생각하고는 그 입장에 입각해 내린 판단을 상대에게 강요하게 될 때, 이미 우리는 약자의 입장에 선 그들과 우리를 차별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영어로는 Understand라고 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 밑에 서는 것(Stand under other)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그와 같은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보다 아래에 서는 자세, 배우고자 하는 자세, 그런 자세가 인간관계의 시작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가장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노숙자가 되는 불합리한 사회
한국에도 노숙자가 있지만 그들과 일본, 특히 오사카 지역의 노숙자는 많이 다르다는 걸 한국에 와서 알게 되었다. 오늘 나는 오사카에서 노숙자들과 함께 살면서 내가 배운 것과 그들의 시각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일본에는 노숙자의 삶을 강요당하는 사람은 약 5만 명 정도이다. 일본의 시민들은 그들을 노동의욕을 상실한 사람으로 보고 있는데 정말 그럴까? 일본에서 건설업 분야의 일용직 노동에 종사하는 노숙자가 늘어난 것은 1997년경부터이다. 일반 중소업계에 종사하는 노숙자가 늘어난 것은 그보다 이른 95년경부터이다. 이 모두 헤이세(일본의 연호,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시기)시기의 거품경제가 터지면서 일어나게 된 일이다. 어느 사회든 불황의 병폐라는 것은 그 사회 주변부에서 시작되어 조금씩 그 사회의 중심으로 이동한다. 중소 영세업에 종사하는 사람 중에 노숙자가 생겼다는 것은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도산하고, 노숙생활을 시작한다는 말이다. 즉 불황이 왔을 때 가장 땀 흘려 일한 사람이 가장 압박을 받고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으르고 일할 의욕이 없는 노숙자?
일본에서는 한번 노숙생활을 시작해 ‘주민표’를 잃게 되면 다시 어딘가에 취직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진다. 그 때문에 노숙을 강요받은 사람들은 알루미늄 깡통이나 신문을 팔아 하루의 생활을 근근이 이어가게 된다. 깡통이나 신문지, 골판지 상자를 모으기 위해서는 불평하는 사람이 없는 시간, 자동차가 없는 시간 다시 말해 늦은 밤에 먼 시외까지 가야만 한다. 오사카시의 조사에 따르면 그런 생활을 통해 하루평균 벌게 되는 생활비가 300엔에서 500엔(3천원~5천원)이다. 남들이 그날의 일과를 마치고 한숨 돌리며 쉬고 있을 때, 또는 한잔하며 여유를 즐길 때 노동을 시작해야만 하는 노숙자들에게 왜 게으르고 일할 의욕이 없다고 하는가. 나는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사람들을 일깨우려 하고 있다. 밤에 거리에서 노숙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하다 ‘생활보험료’라도 받을 수 있도록 힘써보면 좋지 않겠는가 하고 물으면 대부분이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일만 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될 텐데’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다. 노숙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일할 의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일본의 시각 중 또 한 가지 잘못된 것은 사흘 정도만 노숙생활을 하면 좀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속 편한 생활이란 것이다. 2002년 10월 12일자 신문에 오사카 도립대학의 그로다 켄지라는 분이 오사카 시내에서 발생하는 사체검안기록을 조사한 결과가 실렸다. 1년간의 통계를 조사하니 그 해에 노숙자(homeless)로 생활하다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306명이었고, 그 안에는 여성이 6명 포함되어 있었다. 사망장소별 사망인구는 노상이 90명, 공원이 45명, 하천이 17명, 수중(水中) 7명, 간이숙박호텔(한국의 쪽방)이 71명이었다. 이들은 매우 부패하거나 백골화, 미라화된 경우가 33건이었고, 평균 연령은 56.1세로 비교적 젊은 편이었다(최연소는 20세, 최고령은 83세). 사인은 병사가 167명으로 55%였는데, 그 외에도 자살 52명, 타살은 소년이 폭행을 가한 것을 포함 6명이었다. 아사한 사람이 18명, 동사한 사람이 19명이었다. 매년 비슷한 상황이 계속되는 것으로 보인다는 코멘트가 있었다. 노숙자의 평균 자살률은 일반인의 6배라고 한다. 스트레스로 인한 위장, 십이지장 궤양 등 염증으로 인한 사망은 일반의 8배, 결핵으로 인한 사망과 같은 경우 일반인의 44배에 달한다. 노숙생활을 결코 편한 생활이 아니다. 아무도 사흘만 하면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
한번 노숙자는 영원한 노숙자 - 1. 관료적인 노숙자 지원시스템
이러한 노숙생활을 하는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가마가사키이다. 일본 사회만큼 경제적으로 발전한 사회 안에 이렇게 어려운 삶이 있는 것은 한번 실패하면 재기가 너무나 어려운 사회 시스템으로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 노숙자들의 경우 병에 걸려도 병상이 악화되어 구급차에 실려 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순찰을 하다 보면 몸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이 많다. 그나마 상태가 조금이라도 좋은 지금 병원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돈도, 보험증도 없기 때문에 스스로 병원을 찾아갈 확률은 낮다. 한번은 한 노숙자의 몸 상태가 심각해서 구급병원이면 그를 받아줄 수 있겠다 싶어 데리고 갔다. 하지만 병원은 앰뷸런스를 타고 오라며 거부했다. 그래서 그를 병원 앞에 기다리게 하고 구급차를 부르는 전화를 했고, 빈 앰뷸런스에 그를 태우고 병원에 가서, 복지예산으로 치료비를 지급하도록 한 이후에야 겨우 입원하게 할 수 있었다. 본인이 구급차를 불러도 다시 걸을 수 있는지 확인해서는 직접 걸어가라고 한다. 또 병원에 간다 하더라도 쉽게 접수를 받아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몸이 병약해지고, 혹은 자살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오사카에 있는 대부분의 공원에는 노숙자들이 텐트를 치고 움막을 만들어 살아가고 있다. 근처 공원에서 산책을 즐기고자 하는 일반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노숙자들이 탐탁지 않다. 그래서 행정관료나 경찰에게 호소하는 등 이런저런 수단을 통해 그들을 내쫓으려고 한다. 지역주민이 느끼는 이런 감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서 나가라고 하면 어딜 가라는 말인가. 경찰이나 행정당국은 현지 주민으로부터의 요청이 있으면 법률이나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해 철거권고를 하거나 유인물을 돌리거나, 구두로 철거할 것을 권유한다. 그들의 직책상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강제철거를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갈 곳이 없는 이들에게는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하는 박해이다. 만일 그들이 자기 집이나 아파트가 있는데도 공원을 점유하고 있다면 내쫓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공공설비의 일부라 할지라도 맘대로 사유화하는 것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데도 갈 곳이 없는 경우라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오사카시가 고안해낸 해결책은 쉼터공간을 만들고, 자립지원센터를 통해 직업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쉼터는 방마다 2층 침대가 빽빽이 있어 한 층에 100여 명 정도를 수용 가능하게 만들었다. 물론 식사는 제공되지 않는다. 우리는 ‘길거리에 자는 것보다는 쉼터에서 사는 게 좋겠지’, ‘노숙하는 것보다는 자립지원센터에 가면 취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잡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노숙자들이 가지는 첫 번째 바람은 길을 돌아가는 그런 방법이 아니라, 지금 할 수 있는 일자리를 달라는 것이다. 자립지원센터에서는 직업훈련을 하지만 아무리 훈련을 받아도 취직할 곳은 없다.
한번 노숙자는 영원한 노숙자 - 2. 재기불능의 제도적 장벽
노숙자들은 대부분 일용직에 종사하는 노동자인 경우가 많은데, 많은 사람이 일만 가리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정규직에 취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며, 그들의 상태를 자업자득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가마가사키에 살기 전까지 실은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가마가사키에 살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개인의 노력으로는 뛰어넘기 어려운, 동시에 일반인에게는 좀처럼 보이기 어려운, 전업의 과정에서의 어떤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가마가사키에 갈 때까지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왜냐면, 그것은 일반인에게는 장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장애물 아닌 장애물로는 주민표, 신원보증인, 후불임금제의 3가지 요인이 있다. 노숙자들 중에는 같은 간이숙박소의 같은 방에서 10년 이상 생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노동자는 주소불명취급을 받는다. 간이숙박소를 근거지로 주민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행정당국은 간이숙박소가 여관이고 여관에 묵는 것은 여행자임으로, 여행자에게 주민표를 주는 것을 인정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주민표를 얻지 못한 노숙자들의 취업활동은 거의 불가능하다. 작은 방을 하나 빌리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간이 숙박소에서 기거하며 지불하는 금액을 월 금액으로 환산하면 방 한 칸을 빌리는 것보다 비싸다. 그럼에도 많은 노숙자들이 간이숙박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일용직 취로의 미흡함 때문이다. 운 좋게 하루 일을 얻으면 하루 종일 녹초가 될 때까지 일한 뒤 목욕하고 밥 먹고 쓰러져 잔다. 다음날이면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가사노동을 위한 여유가 있을 수 없고, 그나마도 경기가 나빠지면 일조차 없다. 계약노동이라 하여 일정기간 (20일, 한 달 길게는 1년) 동안 막노동 일꾼들의 막사에 기거하며 매일은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일을 보장받기도 한다. 하지만 일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그날의 식사, 숙박을 위한 비용을 빼고 나면 결국 기간을 마치고 손에 쥔 돈은 1만엔 정도에 불과하다. 방을 빌려두었을 경우 그날 밥값도 낼 수 없는 형편에 밀린 집세를 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비싸더라도 간이숙박소가 그들에게는 낭비를 줄이는 방법이다. 경기가 좋을 때 날마다 일해 저금했다 하더라도 일이 없으면 모아둔 돈을 쓰면서 살 수밖에 없고 고향에 돈을 부치지 못하는 자신들의 입장 때문에 가족과의 연락도 취하기 어렵다. 만약 행정당국이 간이숙박소에 기거하는 이들이 주민표를 발급받을 수 있게 기회를 준다면 정규직에 취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행정당국 스스로도 ‘주소 불특정인’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둘째는 신원보증인이다.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특히 노숙을 강요당하는 입장에서 신원보증인을 찾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안정적인 직장일수록 이 조건은 엄격하게 요구된다. 그나마 같은 일용직 노동자 동료의 신원보증은 고용주가 인정하지 못한다. 신원보증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직업도 가끔 있지만 그런 일은 대부분이 젊음과 힘을 요구하는 일이다. 오사카의 노숙자의 평균연령은 57세이기 때문에 그런 일에 취업할 가능성은 0%다. 세 번째 장벽은 급료의 후불제이다. 급료의 후불제는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노숙자들에게 이것은 치명적이다. 맨 처음 급료를 받기 전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일할 수는 없다. 일터가 먼 곳에 있다면 교통비도 필요할 것이다. 이외에도 일용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취업을 방해하는 여러 요인들이 있다. 일본사회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노숙생활이 그들이 일을 싫어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았으면 한다.
‘작은 사람들’에 대한 학대는 스스로를 망치는 것
또한 노숙자들에 대한 학대가 시내 곳곳에서 공공연히 일어나기도 한다. 골판지 상자 속에서 자고 있는 노숙자를 발로 차거나 불붙은 담배나, 깡통을 버리고, 반쯤 남은 캔커피를 쏟아 붓기도 한다. 소년이나 젊은이들의 집단 습격도 빈번히 일어난다. 자전거나 오토바이, 승용차로 밀고 들어와 벽돌조각이나 통나무 조각을 자고 있는 위로 던지고 간다. 여름에는 불꽃놀이 불을 골판지 상자 속으로 쏘아 불을 내곤 한다. 공기총을 쏘고, 등유를 붙여 불을 붙인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이 공공연히 일어나면서 골절상, 화상을 입고 구급차에 실려 가는 노숙자들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성인들, 즉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안정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게으름뱅이라고 무시하고 이런 무자비한 행위들을 눈감아주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방치되고 짓밟히며 살아가는 사회는 밟히는 사람의 인권만이 아니라 짓밟고 무시하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황폐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좀처럼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람은 학대받고 짓밟히더라도 그 사람의 존엄성이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당해도 스스로의 존엄을 고고하게 지켜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람을 학대하는 쪽은 확실하게 ‘못난 인간’이 되어간다. 이것은 노숙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노인들, 장애인, 혹은 스스로를 지킬 수단이 없는 아이들, 국적과 사회적 인습 때문에 사회적 약자가 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해당된다. 주변사람들의 어려움을 목격하면서도 눈을 돌리고, 그들의 호소에 귀 기울이는 것을 거부했을 때, 인간은 스스로를 망치는 것이고 사회는 점점 더 황폐해져 간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작은 사람들’ 아래에 서자(Understand = Stand under other)
노숙자들에 대한 편견의 눈은 쉽사리 사리지지 않는다. 하지만 노숙자가 늘어나는 것은 한 사람의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사회 제도상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각변동이 지표가 가장 약한 부분에서 나타나듯이 사회의 균열이라는 것도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해서 나타나는 것 같다. 노숙을 강요당하는 동료들은 생활설계를 위한 모든 선택을 개별적, 제도적으로 박탈당하고 있다. 그들의 자립과 노동의욕을 높이기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바르지 않다. 그들은 누구보다 많이 일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은 자립적이기 때문에 아무런 법적 지원도 없는 상태에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다. 15년 동안 가마가사키에서 함께 일하고 생활하면서 느낀 것은 그들이 스스로 일해서 자기 생활을 꾸리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노숙하는 사람들에게 지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 부분에 도움을 주는 것이 필요하겠다. 나는 오늘 노숙문제를 가지고 사회문제, 특히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든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여러분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 상대입장에 선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낮은 곳에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 바람의 내용에 연대하는 자세를 가졌으면 한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때 인간은 스스로의 존엄을 상실하고 못난 인간이 된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이 부분을 직시하고 행동으로 옮길 때, 상대의 존엄성과 인권을 존중하는 정부의 시책도 가능해 질 것이다.
* 위의 내용은 혼다 데스로 신부님이 나눔문화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며, 발표자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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