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사랑에도 이름표를 붙여줘!
김선아/ 서울여성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2007. 04. 08.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가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날이었다.
극장 앞에서는 특이한 행사가 벌어졌다.
한국에서 온 일련의 젊은 여성들이
'우리는 결코 <후회하지 않아>를 잊지 않겠습니다 We will never forget No Regret'
라는 문구가 담긴 커다란 현수막을 들고 극장 앞에서 영화 홍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상영 후 감독과 제작자는 무대 위에서 관객과의 대화시간을 가졌다. 자비를 들여서 베를린까지 따라온 이들 한국 여성 팬들은 <후회하지 않아>를 만든 이들을 열렬히 환호했고 감독은 게이 영화에 대한 이러한 광적인 여성 팬덤현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고.
엉뚱하지만 연결된 이야기를 해보자.
그건 다름 아닌 자살한 여배우 이은주의 영화 경력이다.
이은주가 출연한 많은 영화들은 물론 이성애적 욕망의 성긴 실타래에 단단히 묶여 있었지만 그녀는 <번지점프를 하다>에 출연했을 뿐 아니라 <연애소설>, <주홍글씨>에도 출연한 바 있다. 동성애와 이성애의 경계 사이에 놓인 이들 세 편의 영화에서 이은주는 모두 죽거나 시한부 인생을 산다.
그저 우연일까. 청순가련형, 유혹하는 요부형, 순진한 백치형, 약간 비상식적인 사이코 아줌마형 그 어디에도 꼭 집어넣을 수 없었던 이 여배우는 말할 수 없거나 차마 말하지 못한 어떤 것을 자신 안에 꽁꽁 숨기고 있다가 결국 죽음으로 이를 표현한 것일까. 영화에서 자신이 맡았던 역할처럼 말이다.
물론 억측과 과도한 해석이라고 지탄받을 일이지만 그리 완전한 허구는 아닐 듯 싶다. 이 젊은 여배우가 한국영화계가 요구하는 좁디좁은 여성/여배우의 틀을 지극히 답답해했을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니까. 어찌됐든 <연애소설>과 <주홍글씨>에서의 이은주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여성의 동성에 대한 모호한 정서적 감정 혹은 명백한 동성애적인 성적 감정은 결국 죽음이라는 비극적 서사를 반드시 동반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레즈비언 영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도 여기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레즈비언 여성은 울증을 지닌 비극적인 여성이라는 등식이 한국영화에서 성립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또한 명백한 부치(Butch)는 결코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 간의 뒤틀린 삼각관계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게 드러난다. 여성 동성애는 이성애의 '잔여', '그림자', 심하게는 '찌꺼기 혹은 끄나풀' 로만 드러나니까.
여성감독의 영화가 10%도 안 되는 한국영화계에서 여성감독이 만든 '불쾌하지 않은 여성 이미지'에 대한 기대치는 점점 더 낮아질 수밖에 없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감독 또한 여성 관객들이 불쾌하지 않고 환호하는 영화를 만들면 얼마나 좋겠는가.
여성 관객들은 <후회하지 않아>의 팬덤현상에서 볼 수 있듯이 게이영화에는 열광한다. 그건 자신과는 큰 상관이 없는, 그래서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채 보는 자의 위치에 자신을 안전하게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 동성애는 그것이 영화 표면 위에 드러난다 한들 지속적으로 지워지거나 부정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여자들 간의 우정 아닌가?', '여학교에서는 그럴 수 있지 뭐, 남자를 만나지 못했을 때 다 그렇잖아',(<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에 대한 관객 반응)
'제 역할을 동성애자 역할로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것 같아요'(<연애소설>의 손예진 인터뷰에서),
'저를 두 여자가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연애소설>의 차태현 인터뷰) 등등.
영화에서 명백하게 등장하는 부치를 게이 청년으로 오해하는 건 독립영화계 또한 마찬가지이다(<오버 더 레즈보우>를 본 관객 반응).
여성 동성애는 그렇게 우정으로, 이성애로, 남성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과연 우린 언제까지 레즈비언의 욕망을 '감히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사랑'으로만 남겨둘 것인가.
김선아/ 서울여성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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