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국사회] ‘불혹’이 아니라 ‘유혹’
» 정희진 서강대 강사·여성학
종교는 우리에게 죽음 뒤에 삶이 있다고 말하지만, 사랑은 죽음 전에 삶이 있다고 말한다. 노동처럼 사랑(보살핌, 대화, 정치적 연대 등을 타인과 공유하는 활동)과 섹스는, 생존의 조건이자 인간의 존재 형식이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 것과 같다. 〈마더〉라는 영화에서 70대 여성이 30대 남성과 사랑을 나눈다. 게다가 그는 딸의 애인. 고통 받는 그 여자는 “난 아직 죽을 준비가 안 되었나 봐”라고 흐느낀다. 죽을 준비 중의 하나는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
시한부 환자나 노인에 대한 사회적 투자는 회수하기 힘들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효율성을 둘러싼 회의와 논란에 부닥친다. 이들을 위해 자원을 사용하는 것을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누구나 죽기 전까지는 죽은 것이 아니다. 삶은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 이 말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시간의 가치는 평등하다는 의미다. 젊음은 ‘좋은 시절’이고, 중년은 ‘해질녘’인가? 나이를 계절이나 하루 일과에 비유하는 것은, 위계적이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일흔살은 성인의 경지에 이른다는 ‘종심’(從心所欲 不踰矩)인가? 그렇다면 성인은커녕 불법적인 사랑의 욕망에 괴로워하는 영화의 주인공은 한심함을 넘어 노추(醜)일까? 열다섯 지학, 서른 이립, 마흔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공자의 연령주의는, 어떤 면에서 서구 근대성의 핵심 논리인 생애주기와 닮아 있다(정확히 말하면, 생애주기가 연령주의의 일부지만). 특정한 나이에 맞는 사회적 역할과 규범을 정의하는 생애주기는, 젊은 비장애인 남성, 즉, 가장 ‘생산력 있는’ 인간을 노동자 모델로 확보하기 위한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중세에는 아동기라는 말 자체가 없었고, 성차별과 함께 연령차별이 근대 국민국가의 주요 조직 원리가 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사십 이후에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식의 언설은 문제다. 자기 성찰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젊은이’도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죽음 직전까지 불안정하게 흔들리면서, 혼돈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깨어 있는 인간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옥죄고 있는 권위주의, 계급과 교육 문제, 획일주의의 상당 부분은 나이에 적합한 정상성을 요구하는 생애주기 문화 때문이다. 나이 듦이 인생 포기가 아니라면, 왜 황혼 이혼이 뉴스거리이며 예순 넘어 대학에 들어가고 오십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안 되는가?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누구나 언제든지 모든 분야의 초보자가 될 수 있는 사회가 가장 민주적인 사회가 아닐까.
욕망은 결핍에 대한 것. 결핍이 충족되면 욕망도 사라진다. 그래서 ‘불혹의 마흔살’은 어불성설을 넘어 잔인하다. 대개 보통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자원을 잃게 된다. 때문에 ‘늙을수록’ 결핍에 괴로우며, 그만큼 욕망은 커질 수밖에 없다. ‘사십 불혹설’을 퍼뜨리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 성별과 계급 자원으로 나이를 극복할 수 있어서 결핍의 고통을 덜 받는 ‘가진 자’거나, 자기 꿈을 좇기가 두려우니까 남의 꿈도 비웃는 비겁을 ‘집착 초월’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안전은 미신이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유혹당하면서, 자신을 가능성에 개방시키고,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하는, 도전에 매료되는 삶은 개인의 성장일 뿐 아니라 모두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다.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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