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에 바치는 만가 | |||
[한겨레21 2005-06-10 18:12] | |||
[한겨레] 인간의 벌목으로 일어난 침팬지들의 집단학살을 다룬 소설 <다니> 생물학적 결정론을 사회적으로 악용한 무리들에게 보내는 고발장 ▣ 장정일/ 소설가 조금 과장되게 말해서, 고목나무에서 새순이 돋는 것을 스스로 체험했다고나 할까. 김용규·김성규 형제의 <다니>(지안, 2005)는 40살이 넘으면서부터 점점 소설읽기에서 ‘필’을 느끼기 힘들었던 내게 오만 가지 생각을 안겨주었다. 소설의 무대는 빅토리아 호수에서 가까운 탄자니아의 나망가 계곡. 주인공은 영장류를 연구 중인 중국계 미국인 여성 학자 제니퍼. 그는 야생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치는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3년째 나망가 계곡에 텐트를 치고 살고 있던 중에, 나망가 계곡의 동쪽 숲이 벌채되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인간만이 동종을 집단 학살한다? 동서로 길게 뻗은 나망가 계곡의 동쪽엔 울창한 숲이 조성돼 있으며 여기엔 ‘튀틀덤’이라고 이름 붙인 큰 무리의 침팬지 집단이 살고 있다. 또 그보다 훨씬 작은 서쪽 숲엔 ‘튀틀디 집단’이라고 이름 붙인 작은 무리의 침팬지가 산다. 동쪽 숲이 마구잡이로 벌목되면서 그곳에 살던 튀틀덤 집단이 자연히 서쪽으로 이동하게 됐는데, 그 숲은 두 집단이 함께 살아갈 만큼 넓지 않다. 그 소식을 접한 제니퍼는 “이제 곧 제노사이드가 시작될 거야”라며 몸서리를 친다. 같은 종족 내에서 벌어지는 집단 학살을 의미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는, 그리스어 ‘genos’(인종)와 라틴어 ‘cide’(살해)를 합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제노사이드는 개개의 희생자가 살해를 유발하는 행위를 했든 안 했든지 간에, 단지 어느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살해되는 게 특징이다. 동물행동학의 시조로 1973년 노벨상을 받기도 한 콘라트 로렌츠는 <공격성에 대하여>에서 인간이나 동물들에게 공격성은 본능이라고 정의하면서도, 인간과는 달리 동물의 세계에서는 제노사이드가 벌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동물들은 대개 동종을 살육하려는 본능을 억제하는 또 다른 본능적 성향이 있어서 동종 살육 본능을 제어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면서 무기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만이 동종을 집단 학살하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말한다. 그의 견해는 곧 오류임이 밝혀졌다. 사자·늑대·하이에나와 같은 동물들은 인접 지역의 세력권 확장이나 식량, 암컷 등을 얻기 위해 동종을 집단 학살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중요하게 반박된 것은 제노사이드에 가담하는 동물의 가짓수가 아니라, 동물이나 인간의 행동이 타고난 본능에 근거한다는 본능주의 학설이다. 새로운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이나 동물의 행동은 본능이 아니라, 조건 형성에 대한 반응과 강화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들은 유전적 본성을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으면서 사회구조 또는 문화를 중시한다. 청부살해당하는 주인공 다수의 튀틀덤 집단에게 다니가 속한 소수의 튀틀디 집단이 제노사이드될 것을 예측한 제니퍼는 나망가 계곡의 주인인 헨리 웨슬리 경을 아가 벌채를 중지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사회진화론자이자 생물학적 결정론자이기도 한 웨슬리 경은 제노사이드가 “약육강식이라는 자연법칙의 한 단면”이며 “진화를 돕는 매우 유익한 장치”라고 강변한다. 하지만 이미 살해가 시작된 나망가의 비극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위적 개입이 원인이다. 제노사이드를 당하는 튀틀디 집단을 위해 제니퍼가 어느 수준만큼 인도주의적 개입을 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 <다니>의 아킬레스건이었으나 그것이 가늠되기도 전에 그녀는 청부 살해됐다. 그 대목을 보는 순간, 내 속에서 순화되지 않은 절망과 항변이 불쑥 치밀어올랐다. 침팬지를 위해 인간이 죽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니, 제니퍼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죽었다. 이 냉철하고 뜨거운 소설은 20세기 전체를 물들인 숱한 제노사이드에 바쳐진 만가이자, 생물학적 결정론을 사회적으로 악용한 무리들에게 보내는 고발장이다.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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