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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읽었다/존 버거 ‘제7의 인간’

by eunic 2005. 12. 7.
파리의 불이 ‘강 건너 불’일까
[한겨레 2005-12-02 14:18]

[한겨레] 나는 이렇게 읽었다/존 버거 ‘제7의 인간’

- 이혜경 / 소설가

십년 전 이맘때, 나는 외국인 노동자의 권익을 돌보는 걸로 알려진 성남의 한 교회를 찾아갔다.

그즈음,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들이 자꾸만 내 눈에 띄었다.

내가 인권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서가 아니라, 동남아를 한 달 정도 여행한 적이 있는데다, 유난스레 추위를 타는 체질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철 더운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에게 허술한 숙소에서 나는 한국의 겨울이 어떤 것일지, 상상만 해도 몸이 시렸다.

그냥 외국인 노동자에 관한 통계 자료라도 챙겨보겠다고 나섰는데, 교회의 간사는 그곳의 쉼터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게 해주었다.

한국에 온 지 5년 되었다는 마흔 살 난 파키스탄 남성은 섬유, 사출 등 여러 직종을 거치며 여러 번 공장을 옮겼고 다시 일자리를 찾는 중이었다. 직장을 옮긴 이유를 물었더니, “여기서 일하다가, 저기서 돈 더 준다고 하면 가고 그랬다”라고 대답했다.

돈 때문에 신의를 버렸다는 부끄러움과, 돈에 팔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담담히 인정한 뒤끝의 늠연함 같은 것이 그의 표정에서 드러났다.

이야기를 마치고 길로 나섰는데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뭐지?

길에 선 채 생각하다가 빈손으로 간 걸 떠올리고 귤을 조금 샀다.

쉼터에 갖다주고 다시 나왔는데도 뭔가 빠뜨린 듯한 미진함은 가시지 않았다.

지칫거리며 큰길을 향하다 문득 깨달았다,

그들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것을.

한국에서 받은 대우가 어땠느냐고 묻기보다는,

그가 고향에서 불리던 이름을 묻고

그 이름을 한번이라도 더 불러주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는

뒤늦은 깨달음에 이어 <제7의 인간>에서 읽은 구절들이 떠올랐다.

“기계를 가진 자들에게, 인간들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민을 가는 것은 인간들이 아니라

기계 관리 인부, 청소부, 땅 파는 인부, 시멘트 섞는 인부, 세탁부, 공원 따위이다.

이것이 임시 이주의 의미일 뿐이다.”

나 또한 그 구절과 다름없는 짓을 한 셈이었다. 쉼터의 노동자들을 내게 필요한 정보를 줄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고 인간으로 대접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도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까, 의심스러웠다.

존 버거의 글과 장 모르의 사진이 탄탄하게 서로를 받쳐주는 1970년대 유럽이민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 <제7의 인간>은 내게, 이민 노동자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대개 농경사회에서 살던 그들이 말이 안 통하는 나라의 산업현장에서 어떤 마음이 될지도. 몇 년 전, 다른 나라에서 잠깐 살아볼 결심을 할 때도 이 책의 구절이 울려왔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어떤 세계의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그 세계의 모습을 해체하여 자기 시각으로 재조립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행한 일정한 선택을 이해하려면, 그가 부닥쳤거나 거절당했던 다른 선택들의 결핍상태를 상상 속에서 직시해 보아야 한다.”

이태 전, 비자를 받아 ‘불법에서 벗어났다’며 기뻐하던 한 동남아 노동자는 비자 기한이 만료되었는데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불법’의 불안함을 고수하면서 이 땅에 남았다. 한번 잡은 기회를 접고 돌아가기엔 이 땅에서 번 돈이 그의 고향에서 지니는 가치가 너무 크다. 그는 알고 지내는 한국인에게 신신당부한다. 외국인 노동자 정책에 관한 보도가 나오면 알려달라고.

30년 전에 쓰인 이 책은 세계 각지의 해외 이주노동자들, 마침내 자동차를 불태워버린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처럼 이민에는 성공했지만 온갖 차별을 감수하는 이민자들이 바로 지금 겪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글이 무엇일 수 있는지, 사진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 이 책을 보면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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