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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한 말씀만 하소서

by eunic 2005. 3. 24.

[정희진의 책읽기]한 말씀만 하소서 /박완서

한겨레 2002-12-07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고민 끝에 가장 위로가 될 만한 말을 찾아 정성껏 편지를 썼다.

그러나 답장은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아.”

그는 나의 위로를 동정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몇 년 전 미군 범죄 규탄 집회에 갔다.

사회자는 “하느님이 우리 민족을 일깨우기 위해 특별히 순결한 이를 제물로 삼으셨다”고 미 군무원 자녀에게 살해당한 피해자 가족을 위로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그 말이 기막히다는 듯,

“나는 그런 얘기가 하나도 위로가 안 돼요!”라며 더욱 깊게 울었다.

위로의 말이 실제로는 더 상처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연장선상에서, 이 책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어쩔 수 없이, 남의 고통은 나에게 위로와 겸양을 준다. 나의 고통도 남에게는 그럴 것이다.

스스로도 죄의식을 느낄 만큼 비열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힘들 때마다 난니 모레티의 영화 〈아들의 방〉과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1994·솔출판사)를 상기한다.

두 작품 모두 자녀를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언제나, 내가 당하는 고통은 확실한 것이지만 남의 고통은 의심스럽다.

타인의 고통은 그 사람 몸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그의 몸 밖에 있는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랑과 보살핌보다 힘과 경쟁의 원리가 지배하는 ‘동물의 왕국’에 살고 있는 인간이, 타인의 슬픔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타인이 억압받는 타자일 때, 고통의 심연에 닿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작가 박완서는 타자가 아니지만 어머니 박완서는 타자이다.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외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주변 사람의 위로 때문에 더욱 상처받는다.

우리는 흔히 투사(投射), 전이, 이해, 연민, 동정을 위로라고 착각한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그 짐을 나눌 수 있는 지적, 감정적, 인격적 능력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한국사회는 사회적, 개인적으로 ‘트라우마’(잊지 못할 정도의 정신적 충격 혹은 상처)가 많은 사회임에도, 고통에 관한 성찰과 연구가 놀랄 만큼 없다.

나는 고통의 철학적, 심리학적, 종교학적 제 문제와 논쟁점을 이 책만큼 뛰어나게 드러낸 격통의 명상록을 본 적이 없다.

책에는 민가협 어머니, 아니 민가협 여성활동가의 이야기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 실려 있다.

혹자는 이 소설이 작가의 개인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평하지만,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군부독재에 자녀를 잃었든, 교통사고로 자녀를 잃었든 고통은 같은 것이다.

그것을 승화라고 보는 것은 인간의 고통을 위계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어느 누구의 위로도 ‘치욕’이었던 박완서에게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한 수녀가 무심코 던진 “왜 당신이라고 그런 일을 당하면 안 되는가”였다.

그 전까지 작가의 질문 방식은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하는가”였다.

고통은 승화될 수 없다. 그것은 재해석될 뿐이다.

그 점에서 박완서는 ‘행복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고통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언어가 없고 그래서 말하지 못한다.

이성복의 말대로 그저 입을 틀어막고 울 뿐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