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릴레이] 사랑학 개론
⑤사랑한다면서 왜 결혼하니?
여성신문 2002-03-29
결혼 생활 10년째다.
집이 싫어서 일찍 결혼했는데, 내 결혼이 친정 엄마의 집과 똑같은 집짓기였음을 깨닫는 데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결혼은 하되 집은 짓지 말라?’
그게 그리 쉽지 않다.
주변사람들에게 나는 미혼보다 더 제멋대로 사는 날라리로 소문난 반면, 남편 별명은 아예 ‘열부(烈夫)’일 정도로 나를 위한다고 소문나 있다.
심지어 나는 남편의 지나친 애처(愛妻), 경처(敬妻) 행위에 열 받은 남편 친구들로부터 “아침에 00(남편 이름) 밥 안 차려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협박 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
이렇게 ‘훌륭한’ 남편과 사는 나는 지난 10년 동안 ‘금요일 밤 증후군’에 시달려왔다.
주말에 집안 일을 몰아서 해야 하는데, 주말이 두렵고 심란하고 우울한 심리다. 금요일 밤, 나는 명절을 앞둔 큰며느리처럼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전쟁 전의 긴장감과 매주 전쟁에 임해야 하는 비참함이 동시에 나를 압박한다.
남편에게 가사를 분담시키기 위해 비위 맞추기, 애교, 설득, 부탁, 소리 지르기, 울기, 협박 등 다양한 방법을 조화롭게 구사할 정교한 전략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나를 사랑하는 것과 자신이 가사를 하는 것 사이에는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나의 ‘히스테리’가 너무 집안을 깨끗이 하려고 하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라며, ‘마음을 편히 갖는 것’을 해결책으로 내놓는다.
그의 자발적인 분담을 포기한 나는 전략을 바꾸어 구체적으로 일을 지시한다.
“형 착하지? 이불을 방에서 털지 말고 꼭 밖에 나가서 털어 주세요, 형, 내가 점심 때 맛있는 거 해줄게, 가습기 좀 씻어서 물 빼서 말려주세요. 그 안에 전용 솔 있고 세제는 쓰면 안돼요, 형, 제발 와이셔츠 벗기 전에 호주머니에서 명함 좀 빼주세요... 형, 그리고 출근할 때 전기 장판이랑 스탠드 코드 좀 뽑고 가세요...”
그는 그런 일들을 하지 않거나, 내가 그 일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의 1/3도 안 걸리게 대강 해 낸다.
10년이 지나도 그의 가사노동 능력은 하나도 진전된 것이 없다.
최근까지도 나는 “저 사람이 정말 가사에 무능력한 걸까? 아니면 교활한 걸까?”를 치열하게 고민했었다.
난 이 문제를 ‘대화를 통해’ 해결하고 싶었다.
근데 내가 말을 걸면 남편은 늘 “너는 꼭 밥 먹는데 얘기하자고 그러더라” “너는 꼭 잠자는데 사람 깨우더라” “너는 꼭 운전하는데 말시키더라” 이렇게 말한다. 난 그 때 말고는 남편과 얘기할 기회가 없는데 말이다.
지금 나는 대화를 시도하면 할수록 상처받는 관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더 이상 남편의 변화에 내 에너지를 쏟지 않는 것을 삶의 지혜로 수용하고 있다.
남자랑 사는 것은 정말 “사자에게 길들여지는 것”일까?
예전에 레즈비언인 내 친구가 아주 신기하다는 듯이 내게 물은 적이 있다.
“어떻게 남자랑 사랑이 돼?”
그땐 그냥 지나쳤는데, 어떤 의미에서 새삼 명언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조 문제든 개인 문제든 둘 다의 문제든 어쨌든 현재 결과적으로 나는 금성에, 남편은 화성에 살고 있다.
우리 둘의 일상 경험은 너무나 다르고, 각자에게 느끼는 연민과 분노의 이유도 정반대이며, 각자 고민하는 인생 문제도 전혀 딴 세계이다.
우리의 대화를 필요로 하는 사안은 “구정 때 시집과 친정에 무슨 선물을 할까, 자명종을 몇 시에 맞춰놓을까” 정도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기보다 사랑을 유지시키는 제도 같다.
근데 사랑을 유지시키는 데 너무 많은 육체노동, 감정노동이 들기 때문에, 나중에는 사랑을 유지시키는 건지 결혼 그 자체를 유지시키는 건지 분간이 안 된다.
며칠전 후배가 결혼한다고 찾아왔기에, 나는 대뜸 “사랑한다면서 왜 결혼하니?” 했더니 그 친구는 깜짝 놀란다. 10년 전 나처럼 말이다.
정희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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