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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외신기자클럽] 존경을 표하는 동양과 서양의 방법

by eunic 2005. 3. 10.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 vs 허우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

1998년 구스 반 산트는 무모한 요청을 들어준다. 주문은 다름 아닌 앨프리드 히치콕의 대표작 <싸이코>를 리메이크해달라는 것이었다. 계약의 말 그대로 <싸이코>의 신 하나하나를 컬러복사하듯이 다시 만들었다. 어떤 영감도 없이, 자신의 예술의 정점에 있는 천재의 영혼 안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예술가에게 어떤 신비주의적인 양상이 있었던 것일까? 히치콕의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재구성하면서 제작을 한다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거장으로 착각한 것일까? 그의 호기심을 이해한다. 본질상 재생산이 가능한 예술 작품인 영화가 왜 독특하기도 한 것일까?

그러나 이 실습은 매력적인 것인 만큼 헛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의 <싸이코>는 히치콕의 작품과 모든 점에서 유사하지만, 원작과는 하등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자체가 그 안에 실패의 싹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 기꺼이 자책을 하면서 반 산트는 거장에게 극진한 찬사를 표한다. 자신의 새로운 <싸이코> 같은 평범한 영화는 신들의 교묘한 조립에 지나지 않는다고. 또한 히치콕이 위대한 <싸이코> 원작에서 강요한 유일한 터치는 저 너머, 신비로운 구역 안에 위치하는 것으로 반 산트 자신은 그 문턱을 슬쩍 스쳐갈 수 있었을 뿐이라고 고백한다.

지난해에, 일본 스튜디오 쇼치쿠는 대만의 영화감독 허우샤오시엔에게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오마주를 요구했다. 오늘날의 도쿄로 배경이 설정된 영화 <카페 뤼미에르>는 대만에서의 체류 뒤 자신의 가정을 되찾은 한 일본 여성 기자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녀는 임신했으며 혼자서 아이를 키우기를 원한다. 프랑스에서는 칸에 의해 거절되었지만 부산에서는 갈채를 받은 이 훌륭한 영화는 몇몇 오즈 전문가들을 실망시켰다. “이것은 오마주가 아니다. 오즈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사실 오즈는 미미한 흔적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홀드 신이나 사케 한잔 정도로…. 전체적으로, <카페 뤼미에르>는 100%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이며 거의 그의 스타일에 대한 캐리커처이다. 감독의 생각에 오즈의 영화를 다시 만든다는 것은 분명 너무나 건방진 것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반 산트에게 <싸이코>를 히치콕과는 다르게 만들어 자기 것으로 가로챈다는 것은 불손한 행위였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산에 대한 두 가지 개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서양보다는 아시아가 전통에 더 애착을 갖는다고 프랑스에서는 쉽게 말들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만 그렇다. 예를 들어 파리는 서울보다는 훨씬 더 과거에 뿌리박고 있는 도시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된 과거이다. 원래의 돌들이 세월에 부식되어 사라지고 나면 건축 대가들의 작품인 건물들이 똑같은 모습으로 개축된다. 바로 이 작업이 구스 반 산트의 방식에 해당한다.

서울에서는 새것을 위해 옛것을 부순다. 과거가 존재하기 위해 꼭 바깥으로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과거에 표시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의는 과거를 염두에 두면서 새로이 구성하는 것이다.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안에 기와 모양처럼 밀접하게 얽혀서 다시 나타난다. 이 점이 영화의 보존과 복원에 대한 아시아의 매우 최근의, 매우 제한적인 관심 역시 설명해준다. 그리고 여기에 작업의 절대적 완성 즉, ‘걸작’이라는 서양 개념과의 비양립성이 있는 것이다. 허우샤오시엔에게 오즈 야스지로는 유산으로 굳어버린 보물, 대리석에 새겨진 최종적인 작품이 아닌, 작업을 해야 할 살아 있는 재료를 물려준 것이다. 어떤 한 글씨체에 전혀 싫증을 내지 않는 서예가처럼 허우샤오시엔은 자신의 예술에 공자의 명언을 적용한다. “대가란 옛것을 반복하면서도 거기에서 새것을 찾아낼 수 있는 자다.”

아드리앙공보 포지티브 기자.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