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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외신기자클럽] 사후 20주년 트뤼포를 다시 보다

by eunic 2005. 3. 10.
천천히 드러나는 트뤼포식 ’리얼리즘’

최근 한 출판사가 미국의 위대한 비평가인 매니 파버의 저서를 처음으로 불어로 번역했다. 그의 과녁 가운데 프랑수아 트뤼포가 있음을 알고 나는 내심 놀라고 실망했다. <이웃집 여인>의 작가인 트뤼포는 현재 프랑스 뉴스의 핵심에 있다. 그의 사망 2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 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MK2가 감탄할 만큼 훌륭하게 복원시킨 (사진)가 재상영되고 있다.

파버는 트뤼포의 모든 비방자들처럼 그가 지나치게 다듬어진 영화의 대표적 인물이며 트뤼포 자신이 비평가로서 고발한 전통에 대한 지지자라고 비난한다. 파버는 유명한 비평 글에서 ‘흰개미 스타일’과 ‘흰 코끼리 스타일’을 비교한다. 흰개미 스타일은 지하 예술가들의 스타일을 일컫는다. 즉, “가장 훌륭한 영화는 일반적으로 공공연한 문화에 대한 모든 욕망이 없어 보이는 창조자들에게서 나타난다”. 그 반대급부에 자신의 예술(그리고 그 자신)을 가지고 고귀한 이념을 만들어내는 영화인의 흰 코끼리 스타일이 있다. 영화팬이라는 과도한 짐을 짊어진 트뤼포는 파버에 의하면 이 두 번째 부류에 속한다. “트뤼포에게서 드러난 난처한 점- 염증이라고까지 말하지는 않겠지만- 은 인스턴트 커피처럼 생기를 건조시켜버린 신들을 비워버리는 방법에서 생긴다.”

트뤼포는 자신의 나라에서도 논쟁의 대상이 되는 만큼 사랑을 받는다. 파버의 의견을 따르는 젊은 프랑스 영화인들도 다수이다. 그들은 트뤼포와 누벨바그가 대사 위주의, 부르주아적이며 지성에 관한 집착에 갇힌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대중예술을 죽였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시간은 매니 파버의 이론이 잘못됐음을 증명한다. 오늘날 트뤼포는 내게 진정한 ‘흰개미’ 영화인으로서 보여진다. 를 다시 보면서 나는 처음에는 영화에서 드러나는 대중적인 상상의 이미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라진 옛 파리의 모습(이 영화가 내가 사는 곳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아이들의 어릿광대짓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내 안에서 작업을 멈추지 않았고, 조금씩 다른 이미지가 나타났다. 즉, 전후의 생생한 파리의 모습은 무엇보다 더럽고 비참했으며 자신의 아들을 마치 여름학기 학교에 보내듯 소년원에 보내는 어머니의 비겁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고 대사와 상황의 폭력성이 부드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식초로 변하는 좋은 포도주처럼, 이 영화는 천천히 퍼지는 독을 지니고 있다.

트뤼포와 히치콕을 잇는 우정은 (두 사람의 영화에 관한 의견을 담은 훌륭한 책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엉뚱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그들의 조작이라는 장르 안에 있기 때문이다. 트뤼포의 영화는 히치콕적인 여인상의 어떤 점, 즉, 겉으로는 아름다우며 매끄럽고 유혹적이지만 한없이 위험한 점을 가지고 있다. 트뤼포는 고다르와는 달리,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드는 걸 좋아했다. 대가를 기쁜 마음으로 받았으며 스타들을 출연시켰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미지와의 조우>)에 출연하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무고한 척하면서 최악의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는 감언이설적인 시선을 이용하여 빠져나가려고 하는 열등생인, 자신의 영웅 앙투안 드와넬로 남아 있다.

트뤼포의 술책은 에서 드와넬이 심리학자 앞에서 한 문장에 잘 드러나 있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진실을 얘기하면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트뤼포는 영화에 있어 리얼리즘에 심하게 적대적이며 다큐멘터리를 혐오하는 것이다. 트뤼포는 영화에서 세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매혹적인 양상하에서 세상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하고 관객을 자기 자신에게로 끌어들여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관객을 불안정하게 흔들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사후 20주년을 맞아 그가 우리 안에 은근슬쩍 다이너마이트 도화선을 켜놓은 신들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그의 영화들을 다시 보아야 할 것이다.

결과의 옳고 그름에 앞서 현대영화는 기탄없는 실효성, 즉각적인 감정을 추구한다. 몇몇 경우(홍상수 같은)를 제외하고는 우리는 힘의 영화 안에 잠긴다. 이런 유의 영화도 그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트뤼포의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그 매혹의 무한하고 보이지 않는 역량을 헤아려볼 수 있게 한다.

아드리앙공보 포지티브 기자.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