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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정희진의 번신 배추의 번역 불가능성

by eunic 2010. 10. 11.

정희진의 번신(飜身)

배추의 번역 불가능성

BY : 정희진 | 2010.10.08

<번신>은 20대에 인상 깊게 읽은 중국 혁명에 관한 책입니다. 지금은 사유의 시작으로서 몸(身), 소통과 변화로서 번(飜)의 의미에 관심이 있습니다. 인간과 사회를 多학제적, 間학문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의 공부를 좋아합니다. <페미니즘의 도전>,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가정폭력과 여성인권>, <한국여성인권운동사>, <성폭력을 다시 쓴다> 등의 책을 썼습니다.

내가 사는 동네 시장이 서울시의 ‘배추특가 전통시장’ 첫날 개장의 영예를 안았다. 시내 열여섯 군데 시장이 동시에 ‘싸게’ 파는 게 아니라 하루에 두 곳씩 선정되는데, 아마 시 당국은 재정 자립도가 낮은 2개 구(區)를 먼저 ‘배려’한 것 같다. 나는 네 시간 넘게 줄 선 사람들의 인내심에 감탄하다가 그냥 돌아왔다. 최근에 본 007영화에서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의 악당은 석유가 아니라 물을 독점한다는 내용이 떠올랐다. 물 한 병을 위해 몇 킬로씩 줄을 선 남미의 주민들. 배추니까 참지, 영화에서처럼 물이라면?

청와대발 ‘양배추 김치 식단’에 대한 비판 여론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양배추도 비싸다”와 “쑈”라는 것이다. 나는 후자는 아니라고 믿고(싶고), 전자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정치 지도자가 ‘여성일지라도’ 장바구니 물가를 잘 아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생활비의 대부분을 식료품으로 지출하는 나도 제대로 아는 가격이 거의 없다. 한 슈퍼에 1.900원에 10알인 계란과 5.800원에 6알인 계란이 같이 진열되어 있다. 500ml 생수를 350원에 산적도 있지만, 750원에도 사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승용차는커녕 운전면허도 없는 내겐 걷기와 전철이 유일한 교통수단인데, 최근 교통카드가 고장 나기 전까지는 기본요금이 900원인 줄 알았다(1.000원이다). 28g짜리 작은 크림치즈를 각각 500원, 1000원에 파는 가게들이 서로 붙어 있어도 모두 잘 되는 세상이다. 그렇게 사고파는 데에는 합리적인 사연과 이유가 있다. 매매 조건과 품종이 엄청나게 다양화되고 카드 결제가 보편화된 요즘, 예전처럼 “버스 요금이 얼만지 아느냐”는 식으로 정치인의 ‘친서민 지수’를 따지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관습적이고 비현실적인 비판일 뿐 아니라 포퓰리즘의 우려마저 있다. 그런 점에서 ‘양배추 식단’은, (유통 권력 문제는 뒤로 둔 채) 과도한 비판을 받은 측면이 없지 않다.

가격이 비슷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양배추의 식감은 배추의 그것과 전혀 달라서 양배추 값이 웬만큼 싸지 않고서는 배추의 대체재가 되기 어렵다. 양배추는 배추보다 오이나 무와 질감이 비슷하다. 오이, 무, 파, 열무, 알타리, 갓, 고들빼기, 깻잎, 고구마 줄기까지 김치 담그기는 모두 가능하지만, 재료에 따라 각기 다른 김치들 내부의 차이는 김치와 그 외 음식의 차이보다도 큰 경우가 많다. 어떤 김치는 샐러드와 비슷하고 어떤 김치는 장아찌와 더 가깝다. 김치는 하나의 맛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같지 않음, 환원 불가능성은 파생, 응용될 때 명확해지는데 가령, 김치찌개나 김치전은 배추 이외의 것으로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대통령 뿐 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양배추가 배추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 물품이 바다를 건너오면서 기존 단어에 양(洋)자가 붙은 물건이 생겨났지만, 그것은 ‘우리 것’에 해당한다고 간주된 것이지 그 자체가 ‘우리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배추-양배추, 과자-양과자, 다래-양다래(키위), 호두-피칸… 이들 양자는 ‘양공주’와 ‘공주’ 만큼이나 다르다(사람에 ‘洋’자 붙이는 경우와 물건에 붙이는 경우는 서구 근대성의 선택적, 위계적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다르므로, 이러한 비유는 매우 논쟁적이지만 이 글의 논지에서 벗어나므로 생략한다).

양배추(cabbage)에 해당하는 야채는 한국(어)에 없다. 품종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번역은 번역되는 대상(양배추)이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그렇지 않을 땐 피자-빈대떡, (같은 발효 저장 식품이라고)요구르트-된장 같은 어색한 조합이 만들어진다. 이때 빈대떡과 피자는 각각 어떻게 정의되는가? 빈대떡이 피자의 동양판인가 아니면 피자가 빈대떡의 서양판인가? 다시 말해, 무엇이 번역의 기준이 되는가?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가 먼저 시작된 그래서 처음 수출된 서구의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로 인식된다.

배추가 양배추로 번역, 대체될 수 있다는 사고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대량 생산, 대량 소비를 전제로 하는 유통의 정치가 만들어낸 담론이다. 대개 독점의 반대를 과점(寡占)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히는 자급자족이다. 국가 간의 무역을 필연으로 역설하는 비교우위설은 한 공동체의 자급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지, 애초부터 ‘경제적인’ 사고가 아니었다. “배추김치 대신 양배추 김치”는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어라”가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다. 배추 살 돈이 없다면 조금 싼 양배추를 먹으라는 것이다. “한우가 비싸면 수입 쇠고기를!” 너무나 익숙한 구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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