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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정희진의 번신-월드컵 병역 특례론과 남성연대를 넘어서

by eunic 2010. 10. 6.

정희진의 번신(飜身)

월드컵 병역 특례론과 남성연대를 넘어서

BY : 정희진 | 2010.06.29

<번신>은 20대에 인상 깊게 읽은 중국 혁명에 관한 책입니다. 지금은 사유의 시작으로서 몸(身), 소통과 변화로서 번(飜)의 의미에 관심이 있습니다. 인간과 사회를 多학제적, 間학문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의 공부를 좋아합니다. <페미니즘의 도전>,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가정폭력과 여성인권>, <한국여성인권운동사>, <성폭력을 다시 쓴다> 등의 책을 썼습니다.

여성들이 ‘군대스리가(남성들이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에서 듣기 싫어하는 것은 군대 이야기이지 축구가 아닐 것이다. ‘박지성’, ‘베컴’이 나오는 월드컵이나 프리미어 리그에 대한 여성들의 열광은 남성 못지않다. 남성연대의 대명사인 군대 축구가, 축구를 너무 잘해서 군대에서 축구를 안 해도 되는 남성과 ‘군대스리가’가 축구인생(?)의 전성기인 남성들 간의 위계를 드러내면서 이를 여성의 시선을 경유하여 인식할 때, ‘군대와 축구’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기피하는 화제가 될 것이다.

국민개병(國民皆兵)이라지만(혹은 국민개‘병’이므로), 국민의 과반수 이상인 여성과 장애인은 이미 국민 개념에서 선제(先除)된다. 한국인은 병역을 기준으로 세 개의 계급으로 분류된다. 평균 국민보다 ‘잘 나서’ 군대에 안 가는 사람(면제), (‘끌려’) 가는 사람, ‘2등 국민’ (여성, 장애인, 저학력자, 동성애자, 무적자…)이기에 못 가는 사람(배제). 면제나 배제에 해당되지 않아 군대를 가야 하는 ‘나머지 국민들’은 부모의 계급에 따라 다음과 같이 재분류된다. 이들은 “어둠의 자식들”, “사람의 아들”(이들 사이에 “수렁에서 건진 내 아들” 있다), “장군의 아들”, “신의 아들” 언설처럼 최소한 병역과 관련해서는 (극심한)차별 받는다.

나머지 국민들인 이 ‘아들들’이 스스로를 국민의 대표로 재현하여 병역에 대한 사회적 논쟁 구도를 독점적으로 생산한다. 그 대표적인 방식이 안 가는 남성과 가는 남성 사이의 갈등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한국사회 제1의 뇌관이다. 이 문제로 인천공항을 밟지 못하는 연예인부터 대통령 선거에서 두 번 낙선한 정치인까지 있고, 어느 정권에서나 (논문표절, 부동산투기, 탈세와 함께)본인과 자녀 병역 문제에서 공직 후보자는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안 가는 남성은 특권행사 차원의 경우와 “축구(스포츠)를 너무 잘해서”인 경우로 나뉜다. 이제까지 여론은 스포츠 스타의 병역 특례에 크게 반감을 보이지 않았다. 전자가 부정부패 나라망신이라면, 후자는 병역으로 수호하는 국가안보에 버금가거나 혹은 더 위력적인 ‘국위 선양’을 이룩한 것으로, 이들은 국민이 아니라 축구 선수로서 국민의 의무를 초과 달성한 ‘전사’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히딩크는 “한국에는 축구팬은 없고 애국자만 있다”고 했지만, 세상은 달라졌다. 국민들은 축구와 ‘축구를 통한 애국’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팀의 16강 진출 직후 축구협회장의 병특 발언 이후 여론은, “우승을 해도 면제는 안 된다”, “남아공에 병역 면제 받으러 갔냐?”, “스타일수록 병역에 모범을 보여야”, “비인기종목에 부끄럽지 않은가”, “병역은 거래 대상이 아니다”… 등 반대 의견이 대세인 듯하다.

군 가산제 논쟁에서 겪었듯이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군대에 가야 하거나 갔다 온 남성들, 바로 그 ‘아들들’이다. “서울 강남 출신인데 현역이면 부모가 계모, 계부다”, “지방애들은 전방에 배치된다”는 루머가 만연한 사회에서, 현역으로 병역을 마친 남성들 중 일부의(?) 피해의식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특권층에 대해서는 분노와 부러움을, 처음부터 논외의 존재인 ‘非국민’들에 대해서는 우월감이라는 이중 감정에 분열하는 이들의 결론은, “(모두가 가기 싫지만) 모두 가야 한다”는 ‘평등’ 논리다. 남자라면 모두 같이 군대 가서 남성연대를 깨지 말자는 것이다. 이들 입장에서 특권층은 돈과 권력으로 스타는 특출한 재능으로 남성연대를 깨는 자들이다.

나는 이 ‘평등주의’(남성연대)가 역설적으로 군대를 안 가는 특권층의 이해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는 국민은, 개병(동원)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갖기보다는 못 가는 국민을 타자화함으로서 안 가는 국민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보상받는다. 간단히 말해, 지배층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다. 병역이 남남 평등 문제로 제한되는 한(지난 60년 동안 그래왔다), ‘어둠의 자식들’은 영원히 구제될 수 없고 ‘2등 국민’은 사라지지 않는다. “남자는 모두 가야 한다”는 논리에서 강조되는 것은, “모두”이며 “가는 것” 자체는 당연한 가치로 전제되기 때문이다.

특권층의 병역 비리는 매우 비열한 불법 행위고, 국민감정을 고려할 때 철저하게 수사되고 더욱 ‘가혹하게’ 처벌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병역 비리가 규탄되면 될수록, 국방의 의무는 더욱 ‘신성해지고’ 당위적이고 자연스런 가치가 된다는 점이다. 병역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가 남성들간의 평등 이슈로 집중(국한)되면, 군사(軍事) 전반에 대한 다른 내용과 방식의 접근은 봉쇄된다. 한국 군대의 규모(‘현대전’시대에 60만 대군이 필요한가?),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육군 비율(미국은 한국 해공군의 발전을 바라지 않는다), 여타 ‘국방 선진국’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사병 대비 장교 비율… 이런 사안들은 문제화될 여지가 매우 적다.

더 나아가 군대의 존재 이유에 대한 새로운 질문이나 사회적 상상력은 애초에 질식된다. 군대의 존재가 곧바로 군사주의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평화주의든 군국주의든 군대에 대한 고정된 사고에 반대한다. 좀 다른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감히 분단 현실에서 군대의 존재를 의문시하다니! (이적행위다)”. 이렇게 말하지 말자. 나는 이런 방식의 논리를 색깔론이라고 비판하기보다는, ‘지성적’이지 않다는 문제로 제기하고 싶다. 국방 정책이 사유, 토론되지 않는 무지가 애국인 시대는 지났으며, 아직도 이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국방종사자를 무뇌 집단으로 취급하는 ‘국가안보에 반하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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