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번신(飜身)
진짜 빨간색?
BY : 정희진 | 2010.08.06
<번신>은 20대에 인상 깊게 읽은 중국 혁명에 관한 책입니다. 지금은 사유의 시작으로서 몸(身), 소통과 변화로서 번(飜)의 의미에 관심이 있습니다. 인간과 사회를 多학제적, 間학문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의 공부를 좋아합니다. <페미니즘의 도전>,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가정폭력과 여성인권>, <한국여성인권운동사>, <성폭력을 다시 쓴다> 등의 책을 썼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내가 보기에 이 구호는 ‘나쁜’ 말인데 ‘좋은’ 말처럼 출몰한다. 자기계발서 선전과 공익 광고 외양의 대학 홍보물부터, 성실한 개인들의 노트 첫 장, 블로그 대문에까지 심심찮게 등장한다. 어제 내가 받은 카드에도 이 문구가 적혀 있었다. 쓴 사람의 자기 다짐인지, 나더러 그렇게 살라는 것인지, 약간 스트레스를 받았다.
‘생각하는 대로 살라’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굳센 의지와 노력으로 소망하는 미래를 향하여 끊임없이 전진하라는 뜻인 것 같다. 지금처럼 어젯밤 불면으로 무기력한 한여름의 오후일지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언제나 자신을 채찍질하라! 철저한 현실 부정에서 출발하는 이 논리는 단수(單數)의 시간관(“역사는 진보한다”), 생산성에 대한 찬양(“유에서 무를 창조하라”), 인간 의지에 대한 맹신(“안 되면 되게 하라”)으로 요약되는 근대정신을 핵심적으로 설파한다. 사실, 이런 삶은 바람직한가 아닌가를 떠나 일단 불가능하다. 도달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국강병, 글로벌 경쟁력 같은 근대성 실현을 위한 개인의 역할을 명령하는 통치전략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미래는, 말 그대로 오지(來) 않기에(未) 알 수 없다. 도달해야 할 커트라인은 계속 올라간다. 실현한 미래일지라도, 단선적(單線的) 시간관에서 그것은 곧 과거가 된다. 언제나 고달픈 인생. 현재가 미래에 의해 유예되기 때문에, 현재도 미래도 희생된다. 그 밖에도 이 말의 무수한 ‘무서움’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미루고, 여기서 나는 “생각하는 대로 살자”에서 이 ‘생각’의 정체에 대해 쓰고 싶다.
한국사회에서 소위, ‘색깔’은 두 가지 차원에서 작동한다. 써먹는 사람이나 들어야 하는 사람이나 너무 지겨워서 이젠 서로 민망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색깔론은 여전히 기득권층, 언론, 공안 세력의 영원한 ‘대량 살상무기’다. 또 하나는, 진보진영의 ‘색깔 경쟁’이다. 누가 더 급진적인가, 누가 진정한 진보인가, 심지어 누가 진보의 탈을 쓴 보수인가? 를 놓고 색의 명도와 채도를 따지는 선명성 투쟁. 원조, 순수, 기원에 대한 숭배는 후기 식민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유독 한국사회의 일부 진보 세력은 “진짜 진보”라는 자기 정체성에 집착하며 이를 근거로 진보의 위계를 조성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의견이 다른 상대에게 경멸적인 ‘가격표시표’(레테르)를 붙이고, 이를 ‘논쟁’이라고 주장한다. 자유주의자나 민족주의자보다는 사회주의자가, 섹슈얼리티보다는 노동 문제가, 아니 적확히 말하면, 자기가 모르는 문제보다 아는 문제가 더 우선적이고 더 근본적이라는 식이다. 이 각각의 현실들은 무관하거나 중첩되거나 혹은 같은 문제의 다른 표현일 뿐이어서 ‘우월성’을 경쟁할 수 없다. 억압의 ‘긴급성’, ‘주요 모순’은 피억압 당사자들의 상황과 판단, 즉, 정치적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무슨 “~ 주의자”의 경전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진보의 ‘분열’이 문제가 아니다. 이에 너무 감정 – 감정은 체화된 사상 – 을 집중한 나머지 만남과 헤어짐의 정치, 즉 ‘이합집산’과 ‘통일전선’에 취약하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사유의 순혈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 순혈주의는 강자를 욕망하는 태도, 서구 중심성(식민성), ‘생각하지 않음’의 폭력을 신념이라고 믿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언뜻, ‘생각하는 대로 산다’는 추구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므로 미래 지향적인 듯 보이지만, 실제는 그 반대다. 이는 과거에 대한 응답으로서 반동적(re/actional), 과거 중심적 사유이다. ‘생각하는 대로 산다’에서 ‘생각’은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인데, 그 근거는 결국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과거 혹은 현재에 성공한 사람들의 경험이다(“역사는 승자의 기록”). 강자에의 동일시. 이것이 “생각대로”에서의 그 “생각”이다. 힘의 원리를 근간으로 하는 현실주의 국제정치(‘안보 이데올로기’) 담론이 과거 전쟁사로 메워져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서구는 진화의 최정점이자 규범적 중심이며, 발전에 있어서는 가장 새롭고, 전통에 있어서는 가장 오래된 인류의 원형으로 간주된다. 한국의 맑스주의나 여성주의도 서구 중심적 사고에서 멀지 않다. 서구에는 없는 “좌파 민족주의”, “협력적 자주국방”, “좌파 신자유주의 정권” 같은 ‘모순’이 한국사회에서 횡행하는 것은, 우리가 근대성을 오해하거나 왜곡해서가 아니라 개념의 발상지라고 간주되는 서구와는 완전히 다른 경로를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를 ‘바로 잡아’ 서구의 ‘정도(正道)’를 추격해야 할까? ‘앞서간’ 서구의 “~ 주의” 위치에서 현실과 타인의 판관이 되기보다는, 역사는 서구와 ‘비서구’의 공시적(共時的) 상호 작용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몸이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몸은 마음을 설명하는 모든 힘을 갖고 있다. 실천은 행위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생활이지, 기존 이론의 적용이 아니다. ‘적용’은 스스로를 대상화하는 사고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이 강박관념에서, ‘사는 대로의 생각’은 게으름이나 정체(停滯)가 아니다. 이륙했으나 착륙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상태, 즉, 확신보다는 모색하는 삶이 더 ‘부지런함’을 요구한다. 사는 대로 생각하면, 사는 모습 그대로가 바로 저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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