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번신(飜身)
천안함 여론의 북침 공포
BY : 정희진 | 2010.09.27
<번신>은 20대에 인상 깊게 읽은 중국 혁명에 관한 책입니다. 지금은 사유의 시작으로서 몸(身), 소통과 변화로서 번(飜)의 의미에 관심이 있습니다. 인간과 사회를 多학제적, 間학문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의 공부를 좋아합니다. <페미니즘의 도전>,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가정폭력과 여성인권>, <한국여성인권운동사>, <성폭력을 다시 쓴다> 등의 책을 썼습니다.
미 국방부 홈페이지에 따르면 2008 현재, 한국은 독일과 일본에 이어 미군의 해외 시설물(facilities)이 세 번째로 많은 나라다. 독일에 235개(sites), 일본에 123개, 한국에 87개로 표기되어 있지만, 국토 면적 대비를 고려하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미군 시설물이 가장 많은 국가일지 모른다(무엇을 군사 기지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숫자가 곧 기지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세 나라에서 미군의 주둔 목적, 이해관계, 정치적 지위 등은 판이하다. 주지하다시피 독일에 주둔하는 미군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대가 집중 배치된 경우인데, 한국과는 반대로 평화주의, 환경운동 세력, 비판적 지식인 등 진보 세력이 미군 주둔을 지지한다. 주독 미군이 자국 내부 파시즘 세력의 전쟁 욕구를 억제하는 ‘안정자(stablizer)’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주한미군 역시 북한의 남침 뿐 만 아니라 독일처럼 남한 내 반공 세력의 북침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당시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이 이승만 정권의 북진 ‘통일의지’로 골머리를 앓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6.25가 ‘남침이었기 때문에’, 전후 한국사회에서는 북한의 침략을 방어한다는 유비무환이 공식적인 국방 담론이었다. 아니, “공식적인”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북진 통일 의지는 완전히 불식되지 않았다. “평화로운 백의민족”, “강대국의 피해자”라는 자기 최면 속에서도, 5.16 직후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집권 세력은 공공연히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을 해보지 못한 이러한 민족사는 불태워 없애야 한다”고 울분했으니 말이다. 1950년 육군사관학교 개교 이래 생도들의 경례 구호는 “북진통일, 고토회복”이었으며, 이 문구는 88년 서울올림픽 전까지 육군사관학교 충무관 건물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지난 한국정치사, 특히 선거에서 ‘색깔’과 ‘북풍’의 만행은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 6월의 지방선거에서 북풍은 현 정부에 부메랑이 되었다. 이는 북풍 활용 세력의 ‘오버 액션’이나 판단 오류로 인한 단순한 역풍이 아니었다. 경로가 정해진 북풍은 사라졌다. 바람의 성격 자체가 변화한 것이다. 선거를 앞두고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가 아닌)전쟁기념관에서 천안함 사건 기자회견을 갖고 북의 위협을 강조했는데, 이에 대한 NHK, 로이터 등 외국 언론의 분석이 흥미롭다. 한국인들이 천안함 사건으로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공포를 느끼기보다, 대북 강경 의지를 거침없이 표방한 대통령에게 더 큰 두려움을 느껴, 통치 세력의 전쟁 의지를 투표로 막았다는 것이다. 얼마 전 한겨레신문 박창식 논설위원의 글에 인용된 여론조사에서,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 발표를 믿는다는 국민은 32.5%에 불과했다.
햇볕 정책 시절을 제외하면, 그간 한국사회에서 분단은 상황 그 자체로 집권 세력의 무기였다. 서민들의 먹고 살기 위한 투쟁조차 북한에 “오판의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혼란”으로 낙인찍을 수 있었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현실이 진공 상태가 아닌 한, 칼은 녹슬고, 탐욕스럽다 못해 미련한 집권 세력은 칼자루가 아니라 칼날을 잡기 마련이다. 더 이상 색깔론을 통한 대국민 협박은, 최소한 예전만큼은 통하지 않게 되었다. 북한을 ‘동등한 적대자’가 아니라 내부 식민지로 인식하고 경제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흡수 통일을 당연시 하는 세력이 가시화되고 있지만, 그만큼 이들의 ‘준동과 오판’을 우려하는 시민도 많아지고 있다. 북한보다 북한이 무섭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무서워진 것이다.
독일의 파시스트 세력이 전쟁을 막으려는(?) 주독 미군과 갈등 관계에 있는 반면, 우리의 ‘북진 세력’은 ‘조국 통일’에 주한 미군을 활용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심산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위대한’ 미국이 이들의 기대대로 이용 당해줄지 상당히 의문이지만, 문제는, ‘미군 활용 방안’이 (북한이 쇠락할수록)주한 미군과 남한 군사력의 동시 증강 주장의 논거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분단의 지속이든 통일이든, 한반도의 어떠한 변화도 막강한 군사력에 의존하게 된다면, 통일과 평화는 계속 대립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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