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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정희진의 번신 - MB의 기호의 제국

by eunic 2010. 8. 26.

정희진의 번신(飜身)

MB의 기호의 제국

BY : 정희진 | 2010.08.20

<번신>은 20대에 인상 깊게 읽은 중국 혁명에 관한 책입니다. 지금은 사유의 시작으로서 몸(身), 소통과 변화로서 번(飜)의 의미에 관심이 있습니다. 인간과 사회를 多학제적, 間학문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의 공부를 좋아합니다. <페미니즘의 도전>,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가정폭력과 여성인권>, <한국여성인권운동사>, <성폭력을 다시 쓴다> 등의 책을 썼습니다.

세상엔 투명한 선도 완전한 악도 없다. 나는 현직 대통령에게 투표하지 않았지만, 평가할 만한 덕목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MB의 미덕 중 하나는, (인물의 자질과는 별개지만)장관을 자주 교체하지 않는 신중한 인사 스타일, 그리고 행정전문가로 간주되기 쉬운 고위 관료보다 정치적 동지를 선호하는 ‘코드’ 인사다. 전직 대통령은 코드 인사를 이유로 여야를 막론하고 일방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비판은, 실재하지도 않는 보편성과 중립의 이름을 도용한 무의미한 ‘정치 공세’일 뿐이다. 모든 정치 세력은 집권을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이 선거든, 혁명이든, 선거혁명이든 자신의 정치학을 선전해야 한다. 당파는 정치의 필연이자 실현이다. 예를 들어, 민주노동당이 집권했는데 국방부 장관에는 보수 인사를 임명해야 탕평책인가?

빈부격차 증폭, 환경파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더러운 손(조셉 나이의 책 제목 일부로 국제정치 현실을 빗댄 용어)’의 개입, 지구상에 ‘외국’은 북한과 미국 밖에 없는 듯 극단의 두 얼굴 외교, 이 과정에서 “일단, 나를 따르라”식의 안하무인적 태도가 현 정부가 비판받는 주된 이유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비판 내용과 방식이 다소 불편하다. 아니, 불편하기보다는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대통령을 동물에 비유하는 것은 대통령에 대한 모독일수도 있고, 그 동물에 대한 모욕일수도 있다. 이는 인간 대 동물이라는 대립적 시각과 동물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생각을 정지시키는 부정적 선동 효과가 있어서 집권세력과 비판세력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다. 비판은 실천하는 개입이지, 조롱하거나 군림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느 정권과 구별되는 현 정부의 독특한 면모이자 가장 심각한 대국민 범죄(sin)는, 자기 생각을 표현할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설명이나 설득은 기대하지 않는다). 즉, 철학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어는 물리(物理)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다. 실용주의나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정권일수록 언어는 더욱 절실하게 요구된다. 이 문제가 중대한 이유는, 통치자가 언어가 없으면 언어의 기능을 마비시켜 소통 불가능한 사회를 초래하기 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는 ‘나랏말’이 없다. 흔히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라고 하는데, 현 정부는 그 약속, 기억, 학습을 무화시키고 있다.

그간 나는 이명박 정부의 언어를 정말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번 8.15 경축사를 계기로 ‘코드’ 해독에 성공했다. 출범 초기에는 혼란스러움에서 오는 분노가 컸다. 대표적 예로, 내가 아는 “저탄소 녹색 성장”은 후세를 위해 자원을 남겨두는 지속가능한(sustainable)개발인데, 정부는 산, 강, 집의 파괴를 통한 건설업의 성장을 녹색 성장이라고 주장해왔다. 잘못을 미사여구로 포장한 것이 아니라, 진짜 그들의 신념 같아보였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녹색 성장”이 재벌성장이든 환경파괴든 간에 의미가 소통된 결과, 유권자는 지방선거에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이번 경축사에 등장한 “공정한 사회”는 “녹색 성장”과 다르다. 이 기호(sign)는 지시 내용이 없다. “공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한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극심한 갈등상태에서 내가 그에게 너무나 하고 싶었지만 참고 참은 그의 문제점과 그로 인한 나의 스트레스와 고통을, 도리어 상대방이 내 문제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적반하장이라는 말도 안 나오고 말문이 막히면서 대화의 의지와 방향을 잃게 되는데, “공정한 사회”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말의 의미는 사전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에 의해 정해진다. 어떤 가치를 경멸하고 당연하게 위반하는 사람들이 그 가치를 흥분하며 역설할 때, 우리는 분노 이전에 기존의 인식 구조가 붕괴되는 듯한 공황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위장전입, 병역 비리, 부동산 투기, 탈세, 논문 표절, 학력위조…를 일삼는 사람들이 공정함을 부르짖을 때, 이들 ‘공정한 사람’들로 인한 피해자(국민)의 판단은 정지되고 언어는 미로에 빠진다. 이에 맞서, “진정한 공정”을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회적 약자, 다수 국민이라고 해서, 저절로 ‘진정’의 의미를 선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유권자들은 이명박 후보가 깨끗하고 공정해서 대통령으로 뽑은 게 아니다. 사람들은 그의 ‘성공’ 이력뿐 아니라 전과까지 잘 알고 있었지만, 눈감고 그저 “우리 모두 부자 되게 해 달라”고 지지를 보냈다. 도덕적 기대가 바닥인 상태에서 출발한 통치자. 이 대통령은 대단한 행운아이고, 앞으로 이런 경우는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높은 기대와 요구, 그만큼 날이 서 있던 격정과 증오의 비난들을 기억해보라). 현 정권은 “공정한 사회”까지 의욕을 부릴 이유가 없다(설마, 자기 공정함을 잣대로 공안 정국을 조성하지는 않겠지, 나는 그 정도의 기대는 한다).

서구보다 더 서구화(근대화)된 사회, 서구의 결함도 서구의 대역도 아닌 일본을 이해할 수 없었던 롤랑 바르트는 <기호의 제국>에서 자기 딜레마를 고백했다. 일본에는 서구의 언어(기호)에 상응하는 현실이 없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기호의 제국’은 바르트와 다른 것 같다. 원래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사회적 위치에 따라 현실 인식이 다르고, 그것의 가시화가 민주주의이고 소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 정부의 언어는 사회적 경합을 가져오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언어는 그에 해당하는 의미가 없어서, 언어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스스로 침묵하도록 만든다. 그야말로 기호만의 제국을 건설하려는 것 같다. 우리가 살지 않은 다른 공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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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2010-08-23 오후 08: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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