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번신(飜身)
적의를 품은 자연-인간
BY : 정희진 | 2010.09.14
<번신>은 20대에 인상 깊게 읽은 중국 혁명에 관한 책입니다. 지금은 사유의 시작으로서 몸(身), 소통과 변화로서 번(飜)의 의미에 관심이 있습니다. 인간과 사회를 多학제적, 間학문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의 공부를 좋아합니다. <페미니즘의 도전>,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 가정폭력과 여성인권>, <한국여성인권운동사>, <성폭력을 다시 쓴다> 등의 책을 썼습니다.
정물(靜物)인 나무가 동물(動物)인 인간을 죽일 수 있을까? <식스 센스>로 유명한 M.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 <해프닝>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공격자’인 나무와 숲은 미동도 않는데,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차를 몰고 총질을 하고 도망 다닌다. 인간은 저 혼자 마구 날뛰다가 제 풀에 죽는다. 이 작품은 “미스테리 스릴러”로 분류되었지만, 달리 생각하면 신비스럽지도 무섭지도 않은 ‘자연스런’ 영화다. 아직도 노동의 개념을 “의지를 가진 인간이 목적의식적으로 자연을 변화시키는 행위”로 생각한다면, 자연 환경을 극복할수록 문명인이라고 믿는다면, 바람, 나무, 산과 같이 고정된 물상이 인간을 해치는 것은 미스테리일 수 있다.
자연은 수동적이고 인간은 능동적이라는 통념은 고안된 지 얼마 안 된, ‘영 사이언스(young science)’다. 현재 통용되는 지배적인 자연관은 자연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정의하기 위한 것이다. 근대 전후에 조물주이자 유일한 인식자였던 신(神)이 인간의 피조물로 강등되고 인간이 세계의 주인으로 등극했지만,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는 자연과 동물을 동원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었다. “식물인간”, “짐승만도 못한 놈”, “동물이나 하는 짓”, “X새끼”… 인간이 이 생명체들과 얼마나 다르고 우월한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인간은 동물 아님, 자연 아님을 기준으로 자신을 정의해왔다. 물론, 여기서 인간은 백인 남성에 한정된다. 흑인(노예)이나 원주민은 인간과 동물의 중간이고 여성은 인간과 자연의 중간적 존재로 여겨졌다. 물고기, 개, 오랑우탄 등은 피정복민에 대한 흔한 호칭이었다. 이들은 백인 남성의 계몽이 필요한 ‘미개인이어서’, 서구 지식인들은 이 문명화(제국주의 침략)사업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 부담감에 시달렸다.
흑인과 여성에 대한 비하에 분노할 이유는 없다. 인간은 동물일수도 자연일수도 있다. 문제는 인간이 인간다움의 의미를 구성하기 위해 동물과 자연의 개념을 조작(making)했다는데 있다. 자연이라는 개념이 그만큼 자의적, 임의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은 인간 자신의 확장일 뿐, 실제 자연의 모습이 아니다. 아니, 자연이 실체로서 존재하는지조차 논쟁적인 문제이다.
내가 나이 든 탓인지 비관적 세계관 탓인지, 아니면 객관적으로 지구가 변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몇 해 전부터 일 년 중 6개월은 여름, 6개월은 겨울처럼 느껴진다. 겨울엔 너무 춥고 여름엔 너무 덥다. 지난겨울엔 난방비 때문에 아파트 관리비가 여름철의 4.5배까지 나왔다. 그런대도 떨었던 기억이 역력하여 겨울맞이가 두려워진다. 겁먹은 인식 때문일까. 내겐 지난 석 달 내내 비가 오는 거 같다. 비가 떨어지는 땅과 수평인 1층 우리 집의 책장, 벽지 곳곳에 검은색, 푸른색, 회녹색 곰팡이가 만발하고 있다. 빨래는 마르지 않고, 물비린내를 필두로 괴로운 냄새가 온종일 두통거리이고, 청소기는 바닥 습기 때문인지 진공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 물기가 무서워 걸레질을 할 수가 없다.
일상의 불쾌와 불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일상이, 삶이 파괴된 파키스탄이나 북한의 홍수를 생각하면 눈을 감게 된다. ‘이상 기후’는 인간이 자연보호를 안 해서, 자연이 인간 보호를 안 해 주는 현상일까? 자연의 앙갚음? 그렇다면 좋겠다. 쉽지는 않겠지만 인간의 개과천선으로 상황을 개선할 여지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자연의 복수”, 이런 사고방식도 죄지은 인간들의 투사이고, 자연을 의인화하는 인간 위주의 사고일 뿐이다. 자연이 인간을 벌주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면 혹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면, 지금도 쏟아지는 저 지겨운 물줄기는 자연의 복수가 아니라 인간의 어떤 한 모습일지 모른다.
‘환경’이란 말을 둘러싸다(環)는 의미로 생각하는 것은 영어(surrounding)식 사고다. 무엇인가가 인간을 둘러싸고 있다는 인식은 일종의 ‘주인공병’이다. ‘환’의 또 다른 의미, 즉, 고리(ring)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환경을 이루는 수많은 고리 중 하나일 뿐이고, 환경은 고리의 연결들로서 그 자체가 사고의 중심이 된다. 고리, 그나마 더럽고 망가진 고리일 확률이 높은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개척”이니 “정복”이니 “건설” 운운하는 것은 오만을 넘어 망상이 아닐까? 더구나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는 원시림”, “살려주기(정비!)를 바라는 4대강” 이런 말은 진짜 스릴러처럼 느껴진다. 자연이 인간의 손길을 기다릴까? 자기가 짓뭉개놓은 상대에게 다가가 “나의 손길을 기다렸지?”라고 속삭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일부는 “경기 회복” 같은 엉뚱한 신념에 차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자연에 순응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건설 세력’이 인간을 대표하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이 자연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나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이나 모두 <문명화된 자연(cultured nature)>의 일부다. 문제는 인간으로 불리든 자연으로 불리든, 이 문명화된 자연의 폭력이 약자에게 더욱 집요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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