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환>을 여성사로 읽다
<송환>비평의 윤리학과 정치학
당대의 위대한 텍스트 <송환>을 비전향 장기수와 김동원 감독에 대한 존경과 감동, 분노와 질투의 이중 감정 없이 평면적으로 읽을 수 있는 페미니스트는 드물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한국여성'의 포지션에서만 가능하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남성의 역사에서, 역사의 국외자이자, 지배 남성과 피지배 남성 모두에게 억압당한 피해자이며, 동시에 그들과 같은 한국인이고 싶은 여성의 관점에서 비전향 장기수를 다른 방식으로 읽으려는 시도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갈등과 논쟁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아마도 가능하지 않겠지만) 좌우중립, 성별 중립적인 시각에서 이 영화를 인간의 고통에 대한 예의로 접급하는 것이다. 고문의 고통 때문에 체포 당시 먼저 죽은 동지가 부러웠다는 고백, 북한으로의 송환 직전 40여 년 전의 체포 현장을 돌아보며 동지가 피흘린 땅의 흙을 퍼담는 장면, 45년 만에 출소하여 어머니가 간절히 보고 싶은 김선명에게 임종 직전의 어머니를 못 만나게 하고 무덤조차 알려 주지 않는 가족들, 감옥살이에 익숙해져 출소가 두려운 어느 장기수의 "제발 나를 내보내지 마세요"라는 대사,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과 김대중의 역사적인 악수가 "돈으로 산 것" 이라는 보수세력의 비방에 대해 "그렇더라도 무기 사는 돈보다는 훨씬 적은 돈"이라는 감독의 내레이션에, 나를 포함하여 엉엉 울지 않은 관객은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송환>의 주인공들은 북한이 그런 잘못을 할 리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 납북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성폭력은 한국의 젠더 때문이 아니라 외세 문화의 산물이므로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미군이라 확신한다. 30~40년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이 여성의식이 없다고 해서, 매사에 계몽적이고 설교조라고 해서 그들을 비판할 수 있는 '윤리적 포지션'에 있는 사람은 없다. 현실적으로 그들과의 소통은 그들의 고통을 위대한 역사로 인정한 후에만 가능해진다. 나는 한국사회가 그들과 대화할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감독은 이 영화가 장기수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데 일조하기를 바랐지만, 그들의 몸에 새겨진 이성과 감정의 극단 저 너머에 존재하는 독특하게 비극적인 한국 현대사는 너무나 '어마어마'해서, 그들은 존재 자체로 우리를 침묵시킨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여성주의 시각에서 읽으려는 나의 시도는 무모하다. 여성주의적 독해가 장기수의 고통, 감독의 노고와 빛나는 재능, 치열한 시대정신, 놀란 만한 윤리성을 높이 평가하고 깊이 존중하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를 '이견 없는 걸작'이라기보다 '논쟁적인 걸작'으로 읽고 싶고, 이러한 방식의 독해가 감독과 주인공들을 더 존경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송환>에 대한 나의 비평은 텍스트 자체라기보다는 영화의 콘텍스트 즉, 이 세계의 남성성에 관한 것이다.
남성 멜로드라마, <송환>
<송환>의 첫 장면은, "다큐멘터리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믿었던 나도 어느새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생활의 유혹(따옴표는 나의 강조)'을 느끼던 무렵이었다"는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12년간 촬영한 독립영화, <송환>의 제작 환경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감독이 '생활의 유혹'느끼지 않고 돈이 되지 않는 초월적이고 창조적인 영화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그의 아내가 생계와 육아, 가사를 모두 책임졌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남성이 '다큐멘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정치적 신념을 포기한 '후'에나 느끼는 '생활(생계)의 유혹'은, 대부분의 여성들에는 유혹이 아니라 일상적 노동이요, 존재의 조건이다. 거의 모든 장기수들에게 어머니는 특별하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고통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고, 고향의 품으로 돌아갈 시간을 염원한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자막은 '이 영화를 (아내와 어머니가 아니라 더구나 반공주의자인) 아버지에게 바친다'고 적고 있다.
사실, 비전향 장기수의 위대함 그리하여 텍스트 <송환>의 위대함의 전제는, 남성중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법칙인 역사와 일상은 대립하며, 정치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구별된다는 이원론이다. 물론 이러한 이원론은 성별화된 방식으로 위계화되어야만 실현 가능하며, 이때 고결한 가치는 일상과 '개인적인 것'을 무시하고 초월적 가치에 헌신하는 상황에서만 얻어진다.
장기수 '선생님'과 위안부 '할머니'
영화에서 비전향과 미전향은 다르다. 살인적 고문 폭력에도 전향하지 않았다는 뜻인 비전향은 장기수 본인의 관점이고, 전향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는 전제에서 아직 하지 않았다는 의미의 미전향은 남한 파시스트 정권의 시각이다. 전향 후 출소한 장기수들은 고문으로 인한 몸의 고통을 초월하지 못했다는 수치심에 괴로워하는 반면, 비전향 장기수 중 일부는 "나는 그들의 다르다. 전향과 비전향이 종이 한 장 차이는 아니다"며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을 드러낸다. 44년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안학섭은, 남한 인원운동 진영이 판관의 자세로 수감 연수에 따라 장기수의 등급을 매기고 상품화한다며 '꽃다발 사건'을 강하게 비판한다. 영화의 출소 환영식 장면에서 45년간 수감되었던 김선명은 가장 화려한 꽃다발을 목에 걸고 있고, 44년, 38년 살았던 사람들은 수감 연수에 따라 꽃다발의 질과 꽃송이에서 큰 차이가 난다. 이러한 남한 인권운동 진영의 일면과 야만적인 고문을 가했던 남한 당국, 송환 이후 체제 선전에 몰두하는 북한이 제작한 사진집 제목 <우리는 금방석에 앉았습니다>(송환장기수의 북한 생활을 담았다)에서 나는 남성 젠더들의 공통적인 어떤 비극을 느꼈다.
유례없는 참혹과 격동으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에서 전쟁과 국가 폭력의 희생자는 극단적으로 성별화된 주체들이기도 하다. 역사의 주체/행위자로 간주되는 남성은 장기수 '선생님'이고, 남성 역사의 피해자로 간주되는 정신대 여성은 비정치적인 존재로서 '할머니'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남성 담론에서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은 민족의 수치이면, 국가간 전쟁이 만들어낸 가장 비참하고 '더러운' 피해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장기수 남성은 일부 국가 민족주의자나 자유주의자들은 '의미없는 이데올로기 전쟁의 피해자'로 보겠지만, 대신으로서 인간 의식의 가장 정형화된 형태를 보여주는 주체 중의 주체이다. '빨갱이'로 부르는 것조타 그들의 정치적 주체성을 웅변한다. 아직도 레드 콤플레스와 연좌장기수가 앉자마자, "내가 반북 반공 이데올로기에 찌들어있는 너희 의식을 해방시키겠다"고 말하는 장면은 이들의 '과잉 주체성'의 절정이다.
어떤 의미에서 비전향 장기수는 남성 사회가 지향하는 중요한 가치인 현실 초월성, 절제과 극기의 고결을 체현한 가장 아름다운 남성성이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밥을 짓고, 관계 속에서 자아를 형성하며, 항상 타인을 걱정해야 하는 여성들은 도달할 수 없는 가치이다. 물론 이러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남성은 남성들 중에서도 성인, 비장애, 중산층, 이성애, 지식인 남성에 국한된다. 영화에서도 지식인 출신의 장기수 김석형과 소박한 노동자 출신인 조창손은 대비되는 인물이다. 김석형은 학식이 풍부하지만 매사에 가르치려고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반면, 조창손은 빨래, 설거지 등 온각 '하찮은' 노동을 도맡아 하며 동네 아주머니들과 그녀들의 '남편보다 나은' 질 높은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다. 전자는 남성 젠더, 후자는 여성 젠더의 실천임은 말할 것도 없다.
체 게바라와 비전향 장기수의 젠더
안기부의 타협에 의해 출판이 가능했다고 알려진 ‘남파 간첩’ 출신의 장기수 김진계의 생애 구술사인 '조국 : 어느 ‘북조선 인민’의수기 : 김응교 보고 문학'(김진계 /김응교 공저, 현장문학사, 1990)에는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북한에서 대남 파견 활동가 훈련을 담당하는 총책임자는 교육을 마친 주인공애개, “잡히더라도자살하지 말라, 고문당하면 고통받지 말고 전향해서 사회로 나가라, 현실에서 패배하는 자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끝까지 살아 남아라”고 당부한다.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를 비교한 정치학자 권혁범은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체 게바라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는 “스무 번의 혁명(Revolution)보다 한 번의 발전(Development)이 더 힘들다”고 고백한 카스트로에게서 훨씬 더 치열한 혁명가 정신을 발견한다.
모든 ‘악’과의 전면 단절을 제시한 체 게바라의 입장은 매우 투명하고 단순 명확하다는 점에서, 근대적이고 그만큼 비현실적이다. 체의 높은 수준의 의식, 엄격한 도덕성, 이타주의적 성품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에 몸담지 않는 극소수 남성 혁명가만이 실현할 수 있는 가치이다. 만일 체 게바라가 살아서 계속 쿠바 혹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를 이끌었다면 더 억압적이고 고립적인 체제의 형성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송환>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비전향 투쟁은 이념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머리를 돌리려는’ 전향 공작의 폭력성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말한다. 감독 역시 자신은 자유주의자로서 “장기수 선생님들을 완전한 존재가 아닌 보통 사람으로 그리는 것에 가장 주력했다”고 강조하지만, 이 말은 역설적으로 이미 비전향 장기수를 ‘완전한 인간’으로 보고 있음을 드러낸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들은 30~40년 동안 수감투쟁을 수행해 낸 간단없는 혁명가로 묘사된다.
감독이 이 세상에서 가장 순박한 사람으로 소개한(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장기수 김영식은 모진 고문을 당할 때, “세상의 어머니들이여, 아들을 낳으려면 제발 나이팅게일 같은 남자를 낳아 주세요” 라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남성 사회에서 여성 혐오의 대표적인 담론으로, 이때 분단과 군사 독재 폭력의 원인제공자는 어머니가 된다. 한때 깡패 시라소니의 친구였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자랑스러워하는 어느 장기수의 회고, 조선일보 칼럼니스트와 동향에다 동창임을 강조하고, 학군단 출신 감독이 군사 지역 촬영을 막는 장교에게 “자네 몇 기인가? 난 16기야”는 한 마디로 촬영에 성공하는 장면 등은 <송환>의 이념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젠더 드라마임을 보여 준다. 한국 남성들은 좌파/우파이기 이전에 남성이다.
<낮은 목소리>와 <송환>의 차이
<송환>은 국가폭력의 피해자(<선택>, <레드 헌트>, <잠들지 않는 남도>, 무당<영매>), 기지촌 매춘 여성(<나와 부엉이>),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낮은 목소리>)등 사회적 타자를 그린 정치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제기되는 논쟁인 재현 대상에 대한 타자화, 희생자화, 대상화, 피해 사실의 센세이셔널리즘 문제를 극복한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즉, 정치적으로 금기된 소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의 필연적 갈등인 감독의 윤리적, 정치적인 딜레마와 고통받는 사람들을 선전, 대변해야 한다는 자기 억압이 이 영화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왜일까.. 이는 오랜 제작 기간 동안 감독의 철저한 참여 관찰, 운동가로서 감독의 정체성, 탁월한 다큐멘터리작가로서 감독의 재능과 성실성 탓이 크지만, 나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시리즈는 정신대 ‘할머니’에 대한 대상화, 탈성애화 문제와 관련하여 지속적인 논쟁 거리를 제공한다. <낮은 목소리>가 정신대 피해 여성을 피해자화, 타자화했다는 뜻이 아니라, 페미니스트 감독이라 할지라고 감독과 정신대 피해여성 사이에는 동일시가 불가능한 거리가 애초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종, 계급, 나이 등 여성 집단의 ‘차이’와 모순 문제와는 별도로, 기본적으로 남성 시스템에서 여성들은 저절로 같은 여성이 되지 않는다. 여성은 female, woman, feminist로 다양하게 존재하고 이러한 차이는 남성사회의 정치적 억압과 실천의 결과이다.
페미니스트 감독 역시 여성의 경험과 목소리가 비가시화된 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남성사회의 여성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군다나 남성의 시각이 깊게 침윤된 전시 성폭력 이슈를 여성의 시각에서 다루고자 할 때는, 기존의 자가를 버리는 뼈를 깎는 훈련과 새로운 감수성이 요구된다. 이는 그 자체로 자신과 세상에 대한 투쟁이 된다. 우리는 모두 그 과정에 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이자 재현 주체인 감독과 피해 여성이자 재현 대상인 ‘할머니’가 구분될 수밖에 없다. <낮은 목소리>의 ‘할머니’들은 자신과 완전히 다른 고통 경험을 이해하리라 기대하지도 않고, 감독과 자신을 여성범주로 동일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송환>에서는 감독과 장기수 사이에 이런 거리가없다. 감독이 반공주의자가 아닌 이상(혹은 반공주의자라 할지라도), 가독과 장기수는 “모두 남성이기 때문이다.” 남성이 되는 과정에서는 남성 내부의 타자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감독은 정신대 ‘할머니’를 타자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적어도 장기수에 대한 남성감독의 태도처럼 존경하거나 거룩한 존재로 우러러보기는 힘들다. 반면 정치의식이 탁월한 남성감독에게 장기수는 존경하는 선배이자 동지이며, 감독 자신과 연장선상에 있는 같은 민족(물론 남성) 구성원이다.
이것이 바로 거다 러너(Gerda Learner)가 지적한, 남성과 여성의 역사 출발선이 다른 점이다. 남성은 새로 시작할 필요없이, ‘아버지’의 어깨 위에 앉아 여성이 배제된 인류의 지적 전통을 자연스레 전수받으며 세계를 조망하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과 지배 언어가 일치한다. 그들은 언어 없음으로 인해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 감독의 장기수에 대한 시선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시선과 동질적이다. 감독 /장기수간에는 주체 /상관계가 희미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걸출함은 수천 년간 진행되고 있는 남성 사회의 인식론에 상당 부분 ‘편승’한 것이고, 그 물적 토대는 타자화된 여성 집단의 외로움, 노동, 고통이다. 그래서 나는 <송환>으로 여성사를 읽는다.
// 정희진
<이프에 실린 글, 누가 손으로 일일이 친 글을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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