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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당대비평] 나이듦, 늙음 그리고 성별

by eunic 2005. 2. 28.

나이듦, 늙음 그리고 성별

/정희진

당대비평 22호, 2003년 여름호
연속기획/한국사회의 편견과 차별의 구조 8 -노인

'육체 분석학'으로 세상을 볼 때

몇 해전 캐나다의 어느 대도시 공항에 내렸을 때다.
첫 눈에 들어온 것은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피부색 명도에 따른 노동분업이었다. 승무원, 청소부, 쓰레기 수거원, 스택 바 점원, 경찰, 세관원, 짐을 나르는 포터. 이들은 모두 자신의 피부색에 따라 다른 노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청소부 중에 백인은 한명도 없었고 세관원 중에 (흰색도 하나의 유색이지만) 유색인종은 거의 없었다.
이런 식의 직종 분리는 공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직업은 인종(ethnic)에 따라 달랐다. 한국인들은 주로 식료품 가게를 독점하고 있었고 택시기사는 모두 인도인 차지였다.
이주 노동자에 대한 인종주의1),장애, 성별, 성정체성(동성애/이성애), 연령주의.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정치학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소위 소수자 문제2)들을 생각해 보면, 하나같이 몸에 대한 위계적인 해석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된다.
1) 나는 우리 사회의 인종문제는 지역주의와 학벌이라고 보지만,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한다.
2) 정체성이 형성되어있는 역사적 정체적 맥락에 따라 인간은 누구나 이방인이며 소수자이다. 그러므로 주류와 비주류, 혹은 사회적 소수자(minorities)와 다수 개념이 양적인 것은 아니다. 그 경계를 설정하는 권력학에 따라 범주는 매우 유동적이다. 하지만 인구의 반에 해당되는 여성을 소수자로 보는 것은 여성 억압의 심도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여성은 사회적 소수자라기 보다 사회적 약자이다.


몸은 '구별짓기(differentiation)'을 통해 인간을 계층화시키는 물리적 공간이다. 모두 몸이 문제인 것이다.

계급(의 형성)은 위와같은 억압의 결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성별과 이성애주의, 장애문제와 연령주의에 기반하지 않고 계급 억압이 작동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적/남성적/서구적 사고의 전형인 '정신 분석학'적 사고를 상대화하고 '육체 분석학'적으로 세계를 재구성해본다면, 삶이 더 솔직하게 아니 감당할 수 없을만큼 정치적으로 보일 것이다.
성별에 따른 외모와 나이, 나이에 맞는 사회적 지위, 학벌, 옷차림, 섹슈얼리티, 몸의 정상성 여부, 개인의 매력, 개인이 가진 관계망, 능력주의, 심리적 힘 등은 '정치'이전에 우리의 삶을 일상적으로 규율하는 매뉴얼의 핵심적 요소들이다.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표면적으로 표방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갖가지 외침 뒤에 별개로 그러나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이러한 원리에 직면하는 적은, 큰 정치와 작은 정치, 미시와 거시,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등의 경계에 도전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움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정치화하는 것, 이것은 삶이 너무 피곤해지는 문제이다.


이 글은 <당대비평>의 '연속 기획-한국사회의 편견과 차별의 구조 8-노인'에 해당하는 원고이며 나는 여성이므로 아마 일종의 지식 생산의 성별분업 차원에서, 여성 노인에 관한 글을 청탁받았다.
흔히 생각하듯 여성노인문제는 '노인억압'이라는 일반론의 여성 판(version)일까?
여성의 나이들은 연령주의(ageism)와 성별주의(gender system)가 결합된 이중 차별의 결과일까?
피해자가 연소자이든 연장자이든, 연령주의는 단지 차별과 편견의 문제일까? 이 글에서 나는 이러한 질문들을 다시 질문해보고 싶다.

한국사회에서 노인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은, 나이 듦을 생물학적 문제라는 전제아래 사회운동이나 정치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소외 계층에 대한 잔여적 복지 정책의 시혜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노인 문제를 포함한 연령주의에 대해 편견과 차별이라는 언어는 빈곤해 보인다.
나는 연령주의를 우리 모두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율하고 있는 심각한 혹은 '결정적'인 사회적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여성의 나이듦은 연령주의와 성차별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여성에게 연령주의는 성별주의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억압이라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것은 여성 노인, 중년 여성의 문제가 연령주의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성차별로 인한 것이다라는 '주요 모순론' 주장이 아니다.
장애 여성이나 여성 동성애자는 장애인의 범주에서도 제외되고 동성애자 범주에서도 제외되며 여성의 범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정치적 주체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여성 노인문제는 (남성중심적인) 노인학이나 (젊은 여성 중심의) 페미니즘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제이다.
여성의 나이듦을 성차별과 연령차별의 결합으로 보는 것, 여성 노인은 노인 문제라는 '일반'론의 '특수'사례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성 노인은 일주일에 3번은 여성으로 살고 3일은 노인으로 산다는 식의 기계적 사고의 다름 아니다.

이 글은 여성노인 문제에 초점이 있기보다는 나이 들어가는 여성으로서 나의 관심사인 '여성', '노인', '나이듦'에 대한 고민을 정리해보는 수준의 '시론적'글이다.
나는 한국사회에서 정치적 사회운동으로서 여성 노인 운동, 반(反)연령주의 운동이 전개되어야하고 정치적 주체로서 여성노인 활동가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노인의 위치성(position)과 상황은 '드러난'억압의 구체적 사례와 통계를 제시함으로써 나타날 수 있겠지만, 이 글은 그러한 사실을 알리는 것에는 관심이 적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방식으로는 연령주의를 우리 자신의 문제로 정치화시키기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 노인문제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나이듦의 의미를 살펴보는 과정의 결과로서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의 연령주의 정치학
한국사회에서 노인은 기본적으로 계급적 개념이자 범주이다.
지식인, 여성지식인 게이지식인이란 말은 있지만 노인지식인이란 말은 없다. 지식인이나 정치인, 재별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노인이라고 불리지 않으며 그들도 스스로를 노인으로 정체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민에게만 노인의 칭호를 붙인다.
노인이 되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만 문제가 된다.
이것은 나이 듦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사회운동 내부의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 여성운동을 하게 된 경우는 많지만, 사회운동 내부의 연령주의 때문에 노인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아직 없다.
한국 사회에서 노인은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정체성이 아니다.
세대 모순은 심각하지만 세대의 이해와 요구에 근거한 사회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청년운동 혹은 (대)학생운동은 청년이기 때문에 억압받는다는 정치경제학적 문제에 기초한 사회운동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지사(志士)적, 선민(選民)적 운동이다.
"청년이 서야 조국이 선다", "누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는 식의 젊음을 특권화시킨 운동이다.
사회 주체인 젊은이는 조국, 민중을 대상화할 수 있는 권력이 있고 이들만이 나라를 구한다.
('구국운동') 지식인의 사명, 청년의 사명이라는 말도 같은 착각에서 나온 언술이다.
매력, 열정, 가능성, 순수, 치열함은 젊은이만의 표상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일때는 '철이 없거나 주책'이다.
사회의 주체, 즉 노동과 성과 사랑, 욕망의 주체는 젊은 사람(남성)으로 한정된다. 따라서 표준적 인간 범주에서 제외된 노인은 복지의 대상일 뿐이다.

한국사회에서 연령주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논의되고 있다.)
나이에 맞게 살아야한다는 이른바 "생애 주기"식의 연령주의와 나이가 차별의 근거가 되는 연소자/연장자 우성주이다.
군인이나 검사들의 '기수'주의가 봉건적 권위주의라는 비판이 많지만 사실 그러한 현상은 정도를 달리할 뿐 일반 회사나 학계, 종교계, 언론사, 사회운동 내부에도 만연해 있다.
한국사회에서 나이에 맞는 지위를 갖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시선은 '패배자(loser)' 그 자체다.
우리는 일상에서 직업, 지위, 외모, 언어, 태도, 습관, 문화적 취향, 성생활, 결혼 등 삶 전반에 걸쳐 특정한 나이에 맞는 정상성을 요구하고 요구받는다. 성별과 나이는 사회의 기본 질서이다. 거의 모든 인간관계는 성별과 나이를 기초로 조직화되어있다. 사람을 만나고 평가할 때 상대방의 성별과 나이를 모른다면 우리는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나이에 맞는 삶에 대한 문화적 규율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인생을 다르게 살 자유, 방황할 자유가 없고 그것은 쉽게 낙오로 연결된다.
취업시 나이제한이 당연한 규정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남과 다르게 사는 것은 곧 생존권을 위협하는 문제가 된다.(미국에서는 1967년부터 연령차별금지법에 의해 구인 광고나 이력서에 나이를 명시하는 것은 불법행위로 본다.)3)
3) 정경아, 정금나 "한국사회의 연령차별과 인권", 「한국인권의 현황과 과제」《2002 인권학술회의 자료집》 <한국인권제단, 2002>

[나이차별은 전 세대에 걸쳐 이뤄지고 있지만 성별, 인종 등과 달리 고정된 피해집단이 없다는 특성 때문에 뿌리 뽑기가 무척 어렵다. 나이가 들면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뒤바뀌기도 한다.
늦깎이로 고아고회사에 입사하기까지 연령제한으로 고생했던 정선철(35)씨는 "뽑히는 처지일 때는 '나이든 게 죄냐'고 생각했지만 막상 직원을 뽑는 위치가 되니 나이가 든 신입사원이 부담스럽다"로 말했다.]
- 「나이많아 취업 쓴잔」 《한겨레신문》 2002년 5월 7일자

누구나 나이를 먹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경우에 따라 가해자이거나 피해자라는 지적은 일견 타당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노인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누구나 노인이 된다. 노인문제는 곧 당신의 문제다"라는 식의 언설도 마찬가지이다.
대중적 동참의 호소력은 있겠지만, 이러한 관점은 연령주의를 역사적 정치적 문제로 보기보다는 생물학적 문제로 보이게 하며 연령주의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나이 듦이 적용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 나이 듦은 권력에 접근하는 유용한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어떤 이에게 나이듦은 돈으로 커버할 수 있는 개인의 힘으로 통제가능한 문제이지,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문제가 아니다.

나이는 개인의 성별과 계급에 '특혜' 적용방식이 정반대일 수 있을 정도로, 다르게 경험되는 정치적 제도이다.

여성에 대한 억압을 개선하기 두려워하는 사회는 성별 제도를 생물학적 문제로 환원하고 이를 정치화하려는 페미니스트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연령주의의 문제화를 회피하는사회는 나이 듦이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질서라는 담론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인간의 나이는 임의적인 인식과 제도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억압적인 제도이기 때문에 정치경제학적 사회 심리적인 물적 토대를 가진다.
주지하다시피 아동기(childhood)는 성별화된 근대 자본주의의 발명품이다. 중세에는 아동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임금 격차를 정당화하고 여성을 산업 예비군으로서 집안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모성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절대적인 보살핌과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아동기는 이러한 정치 경제적 맥락에서 발명된 것이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려면,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의 근원적인 변화가 동반되어야한다.
나이 듦이 생물학적인 것이라는, 어느 시대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객관적이고, 평등한 것이라는 개념부터 극복되어야한다.
나이에 따라 인간의 권리가 다르지 않다면, 노후(老後)라는 말부터 없어져야한다. 노전(老前) 생확이 따로 없듯이 노후생활도 없는 것이다. 4)
4) 박혜란, 『나이듦에 대하여』 (웅진닷컴, 2001)


여성의 늙음과 남성의 나이 듦

미혼여성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아줌마 같다"이다. '아줌마'에 대한 혐오는 남성중심적인 한국사회가 나이든 여성에게 가하는 처벌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성의 나이 듦에 대한 이 집요한 비난은, 여성들도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여성에 대한 가장 쉬운 모욕이며 통제방식이다.
한국 남성들은 여성이 그 말을 얼마나 싫어하는 지 너무도 잘 안다. 비슷한 맥락에서 여대생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4학년같다"는 말이다.
대학생들의 엠티나 술자리에서 여학생들은 학년에 따라 하는 일이 다르다고 한다.
남학생들은 술을 먹고 술자리를 즐기는 데 반해 나이 어린 1학년 여학생들은 술을 따르거나 노래를 부르고 4학년 여학생들은 음식을 만들거나 시중드는 일을 주로 한다.
여성은 나이에 따라 '애인'으로서 노동하거나 '어머니'로서 노동한다.

남성과 달리 여성은 능력이나 자원보다 나이와 외모가 계급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젊어서 나이든 남성에게 선택될 가능성 때문에) 10대, 20대 초반 여성은 또래 남성보다 권력이 많다.
그러나 (물론 계급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50대 쯤에 이르면 여성과 남성의 권력은 비교 불가능하게 된다.
가부장에 사회에서 젊고 예쁜 여성은 "억압받지 않는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나이든 독일 여성과 그보다는 젊은 남성 이주노동자의 사랑을 그린다.
성별, 나이, 국적은 남녀관계를 형성하는데 상호교환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 영화에서 여성은 나이 들었지만 백인 독일인이라는 것이 자원이며, 남성은 유색인 이주 노동자지만 젊다는 것이 자원이다.
인종주의와 연령주의에 기반한 성별주의가 상쇄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성립할 수 없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woman)은 모든 여성(female)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
'아줌마'는 여자가 아니라 제 3의 성인 것처럼 계급과 나이, 외모, 결혼 여부 등에 따라 '진정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이 있다.
남성중심사회는 여성 개인을 여성이라는 전체 집단의 속성에 귀속시키지만, 사실 남성 사회가 원하는 여성의 개념은 대단히 협소하다.
정숙하고 젊고 예쁜 여성만이 여성의 범주에 속한다.
예를 들어 여성 흡연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있지만 모든 여성에 대해 그런 것은 아니다. '술집 여자'나 할머니의 흡연은 자연스럽다.
한국 사회는 젊은 미혼여성의 흡연에 대해서만 처벌한다.
이는 젊은 여성만이 진정한 여성이기 때문에 그들의 흡연은 여성성을 위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집여자'와 할머니는 남성사회가 규정한 여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여성이기 때문에 그들의 흡연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영화 <엔트랩먼트>에서 70대 남자배우 숀 코네리와 30대 여배우 캐서린 제타존스가 연인으로 나온다.
이 영화는 평범한 오락영화다.
그러나 만일 70대 여자배우와 30대 남자배우가 나온다면 좋게 말해 컬트영화이거나 혹은 대단히 정치적인 영화가 될 것이다.
대개의 경우는 엽기나 불륜으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 분명하다. 청소년 성매수('원조 교제')는 나이가 어리다는 여성적 자원과 나이가 들면서 뒤따른 돈이라는 남성적 자원의 교환이다.
몰성적(gender blind)시각에서 보면 이는 평등한 교환이요 합의된 거래지만, 성인지적 관점(gender perspective)에서 보면 차별이고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이다.
성별 사회에서 여성의 자원과 남성의 자원은 동등하게 평가되지 않는다.
'여성적 자원'인 몸은, 소멸하는 유한한 자원이지만 남성의 자원은 그렇지 않다. 남성은 일생을 걸쳐 남성으로 산다.
첫 생일을 기념하는 남자아이가 자신의 성기를 자랑스레 전시하는 사진관 풍경은 지금도 익숙하다.
성폭력 가해자 중 70대 남성은 흔하다. 그러나 여성은 특정 연령층에만 여성으로 간주되며 나이게 따라 '가격'이 다르다.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는 28세 이후부터 여성들이 (화장술과 외모관리에 따라 개인차가 있지만) 나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연령주의 사회일수록 나이듦과 늙음은 동의어로 간주된다.
그러나 나이듦과 늙음의 상관성은 성별에 따라 다르다.

남성에게 나이 듦이 곧 늙음을 의미하지 않지만 여성에게 나이 듦과 늙음은 같은 말이다.
대개 중간 층 이상의 남성들은 나이가 들수록 권력과 자원에 접근할 가능성이 높지만 여성은 그 반대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분류된 타자이다.
남성의 몸과 다르다는 것이 여성 억압의 근거가 되는 성차별 사회에서는 여성의 존재성은 언제나 몸으로 환원된다.
남성 몸과의 다름이 여성의 존재 '의의'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몸의 경험을 근거로 형성되는 여성의 정체성은 남성중심 사회가 '부여'한 것이지만, 남성은 행위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은 '획득'한다. 그러므로 남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몸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들의 정체성은
몸의 기능과 상태-나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무슨일을 하는 지에 의해 형성된다. 5)
5) Kathleen Barry, The prostitution of Sexuality: 캐슬린 배리 『섹슈얼리티의 매춘화』, 정금나, 김은정 옮김
(삼인, 2002) p41


나이 어린 여성의 순환에 의존한 남성질서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취업률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연령이다.
여성 취업률은 나이에 따라 M자 곡선을 그린다.
여성 취업은 20대에 취업->30대에 결혼, 육아문제로 실업->40대에 저임금, 미숙련, 비정규직으로 복귀하는 양상을 보인다.
소위 여성 적합 직종이라고 분류되는 산후 간병인, 영유아관리, 텔레마케터, 한식 조리사, 애완견 관리사 등은 40대 40대 기혼 여성들에게 가사 노동의 확장된 형태로 주어지는 반면, 20대 미혼여성들에게 여성 직종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사적인 영역이라고 불리는 성과 사랑, 가족 질서에서뿐만 아니라 공적인 노동 시장에서도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노동자원으로 간주된다.

현재 20대 미혼여성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 '행사 도우미' 같은 판매서비스, 대인서비스직은 가사노동과 유사한 단순노동이라고 간주되면서도 젊음과 외모를 중요한 노동 요소로 요구한다. 6)
6) 문은미, 「'여성직종'에서 노동자원으로서의 섹슈얼리티 연구」(성신여자대학교 여성학과 석사논문, 2000)
여성들이 종사하는 직업은 대개 성애화(sexualized)되어있거나 업무와 관련 없는 부분에서도 성적 서비스를 강요받는다. 이처럼 성별화된 노동 시장 구조에서 여성이 상사나 고위직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노동시장에서 여성을 통제하는 남성의 권력은 결국 연장자, 상급자에 대한 '예우'로 고착화된다.

연상의 여인이라는 말은 있지만 연상의 남성이라는 말은 없다.
남녀관계에서 남성이 연상인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나이에 따른 외모를 기준으로 남성 질서안에 끊임없니 순환, 소비된다. 권력을 가진 남성은 젊고 예쁜 여성을 얼마든지 '살수 있고' 젊은 여성들은 그런 남성에게 사랑받고 사랑하기를 원한다.
성별 사회에서 연애는 결국 성별 자원의 교환이다. 남성이 여성에게 원하는 것은 '몸'이거나 보살핌이며 여성이 남성에게 원하는 것은 자원이다.
자원을 많이 가질 수 있는 남성은 나이 든 남성일 수 밖에 없으며, 여성적인 자원을 많이 가진 여성은 젊은 여성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가부장제 사회에서 나이 든 여성과 젊은 남성의 사랑은 성립하기 어렵다.
아니, 성립하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심리적으로 윤리적인 경지에서 그러한 사랑은 '불륜'(변태, 엽기)이라고 생각하며 처벌함에 주저함이 없다.

젠더 구조를 기반으로 하는 글로벌 경제 시대에는 한 사회(지역, 국가)의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다고 해도, 남성은 언제든지 그러한 상실을 보상받을 체계를 갖는다.
자본주의 전지구화, 문화산업의 초국적 자본주의화의 맥락에서 IMF 관리 체제이후 제작되고 있는 한국형 불록버스터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남한 여성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한국의 주변적인 남성들은 자신의 주체성을 구성하기 위한 타자로 남한 여성이 아닌 북한 여성(<쉬리>), 스위스 여성(<공동경비구역 JSA>), 중국 여성(<파이란>)을 동원하고 있다. 7)
7) 김소영, 권은선, 「(한국형 블록버스터)아틀란티스 혹은 아메리카」(현실문화연구, 2001)
김은실, 「지구화, 국민국가 그리고 여성의 섹슈얼리티」, 《여성학 논집》 제 19집(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회, 2002)
이메일로 신부 주문하기(e-mail ordered bride), 여성의 나이와 남성의 국적이 교환되는 국제결혼, 제 3세계 여성에 대한 국제 인신 매매등도 같은 맥락의 사례들이다.
서구 항공사 승무원들은 중/노년의 남녀인 경우가 많은데 반해, 한국이나 동남 아시아의 항공사 승무원은 젊고 예쁜 여성 일색이다.
이러한 대비는 서구 항공사 노동자들이 벌인 노동운동의 성과물이기도 하지만, 성별화된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다.
국제 관강 산업에서 항공사 승무원들은 각국의 이미지를 대표한다. 남성적 서구의 타자로서 적합한 아시아는 여성의 이미지를 갖는데 8)
8) 홍성희, 「여승무원은 왜 미모여야할까?」 『여성의 일 찾기, 세상 바꾸기』《또 하나의 문화》동인지 제 15호(또 하나의 문화, 1999)
이렇게 기표화된, 본질화된 '진정한' 여성은 어리고 예쁜 여성이다.

영화 <집으로>와 <죽어도 좋아>의 여성 노인
성별은 억압적인 제도이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에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안정적인 정체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장치이기도 하다.
양성구유자, 동성애자, 트렌스젠더처럼 성을 구분하는 질서 자체를 교란시키는 '제3의 성'들이 고통받는 이유와 내용은 '제2의 성'인 여성이 받는 차별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노인이나 장애인, 특히 여성노인이나 여성장애인은 탈성화(desexualized)된 존재이다.
이들은 성욕이 없거나 성별 정체감이 없는 존재로 간주된다.
인간이기 이전에 여성 혹은 남성으로서 정체성이 우선시되는 성별 사회에서 탈성화된 사람들은 인간 외 혹은 이하의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장애인 공중 화장실에 남녀 구분이 없는 것, 여성 노인은 성폭행 피해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모든 여성 노인을 할머니로 간주하는 것 등이 그 사례이다. 할머니는 모성만을 간직한 존재라는 환타지는 너무나 강력하다. 여성 노인/남성 노인이라는 지칭대신 할머니/할아버지라는 가족내 성 역할 호칭으로 이들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것은 가족이 가진 비정치적 이미지를 이용해 이들의 문제를 탈정치화하려는 것이다.

'국민' 영화 <집으로>와 '컬트'영화 <죽어도 좋아>는 모두 연애 영화다.
두 영화는 우리의 일상적인 정서가 얼마나 성별과 연령주의에 의존하고 있는가를 충실히 보여주는 텍스트들이다.
일반적인 의미의 연애 각본에는 <집으로>가 충실한 편이고, <죽어도 좋아>는 노부부의 일상을 그린 다큐멘터리다.
<집으로>는 성별화된 사회에서 전형적인 남녀의 연애관계, '여자를 괴롭히는 남자, 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를 그린다. 9)
9) Forward, susan & Torres, Joan, Men who hate women & the women who love them: 서현정 옮김, 『여자를 미워하는 남자, 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명상, 2003)
<집으로>에서 묘사되는 두 남녀의 갈등과 오해, 여성의 무조건적인 정성과 헌신에 감동하는 남자, 두 남녀의 화해와 그리움은 모든 로맨스 영화의 공식이다.

성과 사랑이 정치적인 것, 사회적 구성물이 아니라면 성과 사랑에 대해 어떠한 의미 체계도 없을 것이다.
알고 대화하고 보살피고 싶은 타인이 있다면, 나의 결핍을 메우는 타인에 대한 갈구가 사랑의 시작이라면,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부여된 양도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가 모두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 대한 사회적 해석은 같지 않다.
성별, 나이, 섹슈얼리티, 상대방과의 사회적 관계 등등에 따라 사랑은 동성애, 이성애, 모성애, 동지애, 형제애, 자매애, 조국애 등으로 분류, 위계화된다.
<집으로>가 국민영화가 된 것은 <서편제>가 흥행에 성공한 이유와 비슷하다. <집으로>는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즉 가장 보수적인 방식으로 대한민국 관객의 정서에 호소한다.
<집으로>는 남녀 주인공의 성 역할과 연령주의에 철저히 의지하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할아버지-손자, 할머니-손녀, 할아버지-손녀였다면 이 영화의 '감동'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대중 매체에서 여성노인은 개인, 여성, 인간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출세욕, 자아실현, 성적 욕망에 충실한 나이 든 여성 캐릭터는 없다.
<죽어도 좋아>는 남녀노인을 할아버지/할머니가 아니라 욕망을 가진 개인으로 그렸다는 데 큰 의미가 있지만, 여전히 영화 밖 사람들은 주인공을 박치규 씨, 이순애 씨가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로 부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성과 사랑을 누릴 수 있는 권리는, 개인이 그 사회에서 어떠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정확한 리트머스 시험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특정한 조건의 사람-남성이 연상인 미혼의 젊은 중산층 선남선녀의 이성애-들만이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심리적 타자들-장애인, 노숙자, 나이든 여성들-에게는 성과 사랑의 욕망이 없다고 상정하기 쉽다.

몸에 새겨진 계엄령
서른이 된다는 것은 '젊은이' 영역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태까지는 젊음의 기득권이 당연한 것이므로 이십대라는 기득권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보다 더 살벌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품위 있게 사느냐, 초라하게 사느냐의 문제였다.
'진정성'의 힘만으로는 살아가는 일이 더 이 상 효력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싸울 대상이 없어졌지만 내놓을 목숨 또한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10)
10) 정서연, 「나의 이십대, 뜨거운 여름 같았던 시절」『여성의 몸, 여성의 나이』 《또 하나의 문화》동인지 제 16호 (또 하나의 문화 2001)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 쓴 위의 글은 20대를 길거리에서 보낸 내가 30대에 느꼈던 당혹감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동시에 사람들이 왜 나이가 들면 '보수적'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다.
물론 나이 들면서 사람들이 보수적이 되는 것은 나이때문이 아니라 나이에 따라 구조화된 특정 사회 시스템 때문일 것이다.
20대에 나는 "서른 넘은 인간들은 무슨 희망으로 살까" 혹은 "서른이 넘으면 인간은 저절로 성숙해 질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30대 중반인 나는 개인적으로 (성별로 인한 억압보다는) 나이로 인해 고통받거나 삶이 제한당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나이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와 성별이 다른 남성이나 나이가 어린 여성에게는 당연하게 주어지는 권리가 나에게는 과도한 욕망으로 간주되어 비난받는 일이 일상에 지뢰처럼 깔려 있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부터이다.
단지 나의 나이 때문에 남들에게는 질문되거나 문제화되지 않는 것들이, 늘 나에게는 해명되거나 용서를 빌거나 투쟁해야 할 과제가 되었다.
스물 다섯 이후 10여년동안 나는 여성학과 여성운동을 오가며 여성들하고만 지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남성들과 만나거나 갈등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일상에서는 젠더보다는 계급이나 나이와 같은 여성들 간의 '차이'가 더 문제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나이 듦에 대한 고민과정을 돌이켜보면서 나는 남성들이 여성문제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 역시 20대에는 나이문제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고, 당시 내 고민만에 온 세상을 덮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자기 경험을 뛰어 넘어 타인, 더구나 타자 억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특정 연령 대에 '생산성 높은' 사람들이 주도하는 사회는 매우 위험하다.
그들에게 노인이나 장애인, 어린이, 강요한 성 역할을 수행해야하는 여성들의 경험을 이해하거나 대변하기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한국 사회는 계엄령이 필요없는 사회다.
사회 구성원들의 상상력, 용기나 소망은 나이에 따라 철저히 제한되어있다.
우리는 대단히 자발적으로 나이 듦에 대한 지배 이데올로기-누가 지배하는지 모르는-를 수용하고 있으며 나이 든 자, 나이 든 여성을 혐오한다.
일상의 아주 감정적인 차원에서부터 나이 듦에 대해 동일한 해석 틀을 가지고 있으며 미세한 검열과 규율에 예속되어 있다.
나이에 따라 삶의 가능성이 체계적으로 억압된 사회, 이것은 '고도로 조직화된 조용한 폭력'11)이다.
11) 김은실, 『여성의 몸, 몸의 문화정치학』(또하나의 문화, 2001), p38

나이든 사람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시선을 다시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반(反)연령주의 정치가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