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2004년 겨울호 게재
<다모>, <포카혼타스>, <뮬란>의 여자들...
나 역시 ‘폐인’이었던 MBC 드라마 <다모>는 대단히 재미있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는’ 않다. <다모>는 신데렐라 드라마보다 더 재앙이다. 여성을 팔방미인으로 재현하는 <다모>는 매우 여성 혐오적, ‘민중’ 혐오적, 서구 중심적 텍스트다.
얼마 전 미혼 남성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도 증명되었듯이, 한국 남성들은 현모양처형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모양처는 기본이다. 현모양처에다 똑똑하고 돈도 잘 버는 여성을 배우자로 원한다.
<다모>는 이러한 한국 남성의 여성 판타지를 빼어나게 재현한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밥 잘하고 정숙하면 됐지만, 현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밥만 잘해서는 어림도 없다. 밥 잘하면서 돈도 잘 벌고, 정숙하면서도 섹시해야 하며(물론, 섹시해야 하지만 섹스를 해서는 안 된다), 예쁘면서도 지적이고, 똑똑하면서도 겸손하고, 헌신적이면서도 앞에 나서지는 말아야 한다. <다모>의 여주인공은 이 모든 것을 다 갖추었으며, 게다가 무술까지 잘한다.1)
<다모>, <포카혼타스>, <뮬란>은 모두 비슷한 정치적 맥락 속에 있는데, 이 텍스트들은 서구의 시각에서 보면 성역할 질서를 교란하는 ‘여성 해방’ 드라마들이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모두, 다방면에서 완벽하고 (남성의 역할인)무예에 출중한 전사들이며, 조국을 구하기 위해 멋진 남자와의 결혼과 로맨스를 기꺼이 포기한다. 한 마디로, 남자에게 픽업되기를 소망하며 외모 가꾸기에 열중하는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은, ‘남성-생계 부양자’,‘여성-가사노동자’라는, 근대 초기에 형성된, 서구 백인 중산층 중심의 성역할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했을 때 얘기다.
제 3세계, 가난한 사회에서는, 이미 여성들은 공적 영역에서 언제나 그리고 오래전부터 노동을 해왔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성역할 고정 관념은, 남성을 위해 죽도록 일하는 여성이다. 그러므로, 다모 채옥(하지원 扮)같은 캐릭터는 전혀 전복적이지 않다.
<다모>는 한국사회의 일상적 성역할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재현한다. 한국 남성 젠더의 특징은, 일명 ‘식민지 남성성’으로 초남성성(hyper-masculinity)이 몸에 밴 무기력, 무능력, 폭력성이다.
이에 반해, 한국 여성들은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의 양 영역에서 이중노동을 하면서, 의존적인 남자를 보살피고, 달래고, 먹이고, 기 살려주는 ‘적극, 억척 아줌마’다.
이광모의 <아름다운 시절>은 이런 어머니에 대한 향수가 짙게 배어 있다.
로맨스를 빙자한...
<다모>는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을 재현한다. 근대화란 곧 서구화를 의미하므로, 서구에서는 자본주의와 근대성이 갈등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3세계에서 근대와 자본주의는 식민지 침탈과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근대성과 식민주의는 늘 긴장 관계에 있다.
지난 세기 동안 한국 사회과학계의 기본 논쟁이 바로 이 문제다. 일제의 식민지 조선 건설이 의도했든 아니든 한국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는가, 아니면, 식민지 건설은 단지 수탈일 뿐이었나?
얼마 전 ‘군 위안부’ 관련 발언으로 여론 재판을 당했던, (한국사회에서 몇 안 되는 남성 페미니스트인) 이영훈 교수는 전자의 입장, 즉, ‘식민지 근대화론’을 대표하는 논자다.
후자는 ‘조선 내재적 발전론자’ 혹은 ‘민족주의’ 진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모>는 전형적인 남성 드라마로, 1980년대부터 계속되고 있는 소위, ‘NL-PD’ 논쟁을 그리고 있다. 조선 민중의 고통에 분노하는 장성백(김민준 扮)은 계급 모순을 주요 모순으로 보는 'PD' 계열이고, 외세 침략에 더 민감한 조선 왕조 신봉자 황보윤(이서진 扮)은 'NL'계열이다.
<다모>나 <파리의 연인>처럼, 여자 한 명을 두고 남자 두 명이 경쟁하는 대부분의 삼각관계 드라마들은 로맨스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남성들간의 갈등과 위계를 설명하기 위해 여성을 동원하는 ‘남성 주체 드라마’다.
로맨스는 부대 장치에 불과하다.
<다모>는 조국의 운명을 가름할 절대 절명의 중요한 선택, 즉, 'PD' 장성백의 노선을 따를 것인가, 'NL' 황보윤을 따를 것인가의 최종 선택의 책임을, 한낱 어리고 힘없는 계급의 여자인 다모 채옥에게 맡긴다(‘뒤집어 씌운다’).
채옥이 두 남자 중 누구를 사랑하고 선택할 것인가에 따라, 국운과 몇 천 명 남자들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
평소 보잘 것 없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한다면, 대단한 ‘역할’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동아시아 남성 젠더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데, 경국지색(傾國之色) 담론이 대표적이다(남성의 미모는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는다).
나라를 망하게 할 여성의 미모에 대한 두려움은, 여성을 혐오하고 낮은 지위를 강요하면서도, 국가의 운명이 고작 여성의 미모에 달려있다는 남성의 책임회피, 과대망상, 피해의식을 보여준다.
멜로드라마, 남자 영웅 탄생기
무엇보다 <다모>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 영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어떤 끔찍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있다.
이 드라마는 제노사이드(인종 청소), 홀로코스트(대량 학살)의 정치학이기도 한데, 전형적인 근대 국민 국가 이데올로기를 재현하고 있다.
근대 국민 국가는 인종적, 성적, 지역적 타자와 장애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면서도, 이들을 ‘국민’, ‘민중’, ‘시민’, ‘민족’, ‘노동자’의 이름으로 이용하고 통합한다.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제주도쯤은 기꺼이 왜구에게 넘겨버리겠다”는 이 드라마의 발상은, 이후 이승만 친미 반공 국가가 자행한 대량 학살, 제주 4.3이라는 ‘현실’의 역사로 연결된다.
‘우파’ 드라마답게 <다모>는 정부군은 도덕적으로 묘사하는데 반해, 혁명군은 대단히 부정적으로 재현한다(물론, 이성애자 여자들의 완벽한 판타지, ‘김민준’은 예외다).
오로지 영웅의 의지를 잃은 장성백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아랫마을 사람들을 아무 이유 없이 도륙하는 대목은 정말 눈을 감고 싶은 장면이다.
민초들은 영웅의 투쟁 의지라는 심리 상태 보존을 위해 죽어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남자들의 정치란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그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가치는 무엇인가?
사실, 가부장제 역사에서 이런 식의 이야기는 매우 흔하다.
박중훈 주연의 영화 <황산벌>의 계백 장군은, 1남 2녀의 자녀와 아내를 칼로 베어 죽인 다음 전쟁터로 향한다. 패배를 예감한 계백은 적의 손에 가족을 죽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고, 조국 백제를 위해 황산벌로 달려가 장렬히 전사한다.
여성과 어린이는 남성 영웅의 경합과 탈취의 대상이며, 남자의 명예를 저장하는 보관소로 여겨진다.
남성 영웅들의 정치는 여성의 몸에 실현되는 것이다.
계백 이야기의 최신판은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다.
이 영화는 80년대 격렬한 민주화운동, 즉, 남성 파시스트 정권과 남성 저항 세력이 투쟁하는 사이에, 혹은 그러한 남성 중심적 정치전선 때문에, 살해되는 여성 대상 살인 사건을 다룬다.
이 사건의 범인은 민주와 반민주라는 정치전선에 참여하지 않고, 여성을 죽임으로서 또 다른 전선(젠더 전선)을 만들고 있지만, ‘주류’인 좌우파 남성들이 관심 가질리 없다.
남성 감독의 시선은 다소 비윤리적인데, 이 사건에 대해 비판적이지도 않고, 여성들의 죽음을 슬퍼하지도 않는다.
여성의 죽음은 남성 정치의 부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 비오는 철로 변에서 용의자인지 범인인지 모르는 남자(박해일 扮)의 뺨을 잡은 형사(송강호 扮)의 대사(“밥은 먹고 다니냐?”)는 가부장제 사회의 기본 구조, ‘남성 동성애’의 하이라이트다.2)
남성성 - 권력인가, 폭력인가
<파리의 연인>3)을 ‘진화된 신데렐라 드라마’라고 보면 곤란하다.
신데렐라 드라마 열풍을 사회의식이 없는 여성들의 현실 도피나 대리 만족으로 판단한다면, 이는 이런 드라마만큼이나 무기력하고 여성 혐오적이다.
이러한 분석은, 여성을 ‘골 빈 드라마 소비자’로 몰아세우는 한국 사회의 여성 비하를 부추길 뿐이다. 총알이 슝슝 왕복하는 허무맹랑한 액션 드라마나 게임에 심취하는 남성 소비자는 이 정도로 비하되지 않는다.
<파리의 연인>은 두 남자 주인공이 연애에서 남성성을 경쟁하는 것을 통해,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성들간의 계급투쟁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들의 계급투쟁을 ‘범생’과 ‘날라리’ 담론으로 설명해보자. 한기주(박신양 扮)는 범생과 날라리의 특성을 모두 전유하지만, 윤수혁(이동건 扮)은 날라리의 매력에 기댄다. 글로벌라이제이션 경제 체제 이전에는, 범생과 날라리는 뚜렷이 구분되었고, 날라리에게도 문화, 외모, 성격 등의 차원에서 어느 정도의 권력이 주워졌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전 세계가 점차 20:80의 사회로 양극화되면서, 이제는, 자본이 인간의 모든 자원과 매력을 획득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어가고 있다. 자본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교육이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되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
이제는 부자 집 아이들이 공부도 잘하고(아니, 부잣집 아이가 아니라면 공부를 잘 할 수 없고), 운동도 잘하고, 외모도 좋고, 몸매도 좋고, 노래도 잘하고, 심지어 품성도 좋다. 한기주가 이런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윤수혁이 승부를 거는 매력은, 경쟁력이 없으며,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하다.
이성애 연애는 기본적으로 성별 정체성의 강화를 통해 가능하다.
수혁은 나중에 자신의 권력 기울기를 상쇄하고자, 강태영(김정은 扮)에게 폭력이라는 남성성 카드를 꺼내지만, 전혀 효과적이지 않다.
남성의 폭력이 매력적일 때는 전 근대 사회, 혹은 권력이 비슷한 남자들 사이에서나 그렇다.
여성성과 남성성은 사회적 산물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 내용이 다르다. 자본(기주)이라는 남성성과 폭력(수혁)이라는 남성성은 경쟁이 가능하지 않다. 자본 앞에서 폭력은 박력이 아니라 ‘양아치’성일 뿐이다.
삼각관계 - 주체는 타자의 선택으로 완성된다
<파리의 연인> 역시 <다모>처럼 남성들간의 견딜 수 없는 정치적 긴장을 로맨스로 포장하고 있다.
자신들이 승부 결과를 직면하지 못하고, ‘신데렐라’가 선택하게 하는 장치에 의존한다.
주체는 타자의 인질이기에, 진정한 남자, 진짜 승자는 타자인 여성이 지목하는 남자다.
남자들간의 상호 ‘승인 투쟁’은, 여성이라는 관객 혹은 들러리 없이 상연되지 않는다.
김기덕의 <나쁜 남자>는, 여성이 ‘선택’이라는 최소한의 행위성이나 의지조차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극도의 여성 혐오를 보여준다. 아예 납치해 버리는 것이다.
물론, 근본적으로 ‘여성의 인정을 받아 혹은 여성을 소유하여 남자 되기’라는 게임의 법칙은 같다.
이는 남성 평론가들이 왜 그토록 김기덕의 영화에 열광하는지를 알게 해준다.
김기덕을 ‘띄워주는’ 중산층 남성 지식인이 하고 싶지만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모든 여성을 ‘창녀’로 환원하기와 같은 남성성의 실천을, ‘하층 계급 출신’인 김기덕이 대리하여 재현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김기덕은, 연속선상에 있는 성역할과 성폭력/성매매의 거리를 아주 경제적으로 좁힌다.
김기덕 영화에 나오는 남성 캐릭터들은 꽃다발과 선물 공세라는 일상적 성역할 노동 없이, 남성성 그 자체의 힘만으로 곧바로 ‘성관계’(성매매나 성폭력)를 한다.
바로, 이 점이, 여자가 필요하지만 최소한의 존중도 귀찮은 남성들의 어떤 순간을 포착하는 김기덕의 능력이다.
<다모>나 <파리의 연인>에서 채옥과 강태영은 주인공이 아니다.
그녀들은 단지 남성들의 삶과 행위를 설명해줄 뿐이다. 이 드라마들은 남성의 정치적, 역사적 변화를 논하는 것이지, 여성의 변화를 그리지 않는다.
이창동의 <박하사탕>처럼, 남성 드라마에서 여성의 삶은 변화가 없다.
<박하사탕>의 남자 주인공은 80년 광주 항쟁부터 97대 후반 IMF까지 격심한 역사적 변화를 이끌고, 겪어가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은 ‘창녀’, 아내, 애인일 뿐이다.
여성은 역사의 외부에서 살아가는 비역사적인, 비정치적인, 그저 몸인, 정지된 존재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의 여성 캐릭터는 여성의 성역할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파리의 연인>에서 강태영이 윤수혁의 아내이든 기주의 아내이든 무슨 큰 차이겠는가? 모든 아내는 같다.
각기 다른 여성을 같은 여자의 범주로 묶는 제도가 바로, 가부장제 결혼이고, 이성애 로맨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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