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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여성부발간책자] ‘다른 목소리’

by eunic 2005. 2. 28.

‘다른 목소리’
/정희진

여성부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발간 책자 원고


나는 10여 년 전부터 대학과 시민단체, 정부 기관과 노동조합에서 여성학 강사로 일하고 있다.
상담, 인권, 사회운동, 폭력, 섹슈얼리티, 탈식민주의 등 기존의 분과 학문 체계를 횡단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강의한다.
내 강의에 대한 반응은 크게 “어렵다”, “재밌다” 두 가지다.
어려운 것과 재밌는 것은 반대가 아니라 연속선의 감정인데,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강사와 소통이 된(“알아듣는”) 순간, ‘난해함’이 쾌락으로 변하는 것을 경험한다.

흥미로운 것은, 내 강의가 쉽다고 평하는 사람들은 주로 전업주부, 폭력 피해여성, 저학력 생산직 기혼 여성 노동자 등, 소위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우리 사회에서 목소리가 침묵 당해온 여성들이다.
심지어 그들은 “선생님이 너무 겁이 많다, 더 ‘쎄게’ 해 달라”며, 내게 (표현의 급진성이 아니라)인식론적 급진성을 요구한다.
“여성주의는 중산층 지식인 중심이라 ‘민중 여성’들이 모르는 이야기만 한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는데, 내 경험으로는 별로 그렇지 않다.
제도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억압당해온 여성들일수록 내 강의를 좋아한다(내가 겸손하게 표현해서 그렇지, 실은 ‘열광’한다).
그들은 내가 설명하는 프로이드, 맑스, 라깡, 부르디외, 쥬디스 버틀러의 이론에 깨달음의 무릎을 치고, 앎이 주는 환희에 박수를 보낸다.
여성의 경험이 그 자체로 이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이라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깨닫고(positioning) 삶을 성찰하기 시작하면, 여성주의 사상과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전문직 종사자나 이른바 ‘여론 주도층 인사들’은 내 강의가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내 강의를 들은 박사 학위를 소지한 어느 50대 남성은 “뇌가 고문당하는 것 같았다”고 하고, 어느 노동운동가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고 표현한다.
나는 이런 내용과 비슷한 이 메일을 종종 받는다. 그들에게 내 강의가 ‘어려운’ 것은, 내가 관념적이거나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아무도 모르게” 현학적으로 말해서가 아닐 것이다.
여성주의 강의는 남성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사유 방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들은 이제까지 “여성주의는 편파적이고 나는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다가, 자신의 사고 역시 편파적이며 더구나 강자의 경험을 보편과 객관으로 믿어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물론, 나도 여성주의를 접할 때마다, 장애인이나 동성애자들의 이론을 공부할 때마다, 매번 그런 충격에 휩싸이며 나를 다른 세계로 이동시키는 그 순간을 행복해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제까지의 지식과 언어가 누구의 삶을 기준으로 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래서 다른 목소리인, 여성의 목소리는 존재 그 자체로 전복적이다.
사실, 여성주의는 객관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다. 아니, 그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여성주의는 무전제의 전제에서 출발하지도 않고, 그 어떤 전제도 없는 청중들을 설득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에 그런 청중은 없기 때문이다.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는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 그것 밖에 없으니까요.”라고 답한 프랑스의 철학자 루스 이리가레이의 말대로,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 한 가지 목소리조차도 알기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나는 모 신문사에서 주최한 ‘남성과 가족’이라는 주제의 좌담회에서, 평소 나와 절친하며 여성운동에 우호적이라고 알려진 어느 남성으로부터 ‘충고’를 받았다.
그는 “페미니즘은 자기주장을 하기 전에, 남자는 불쌍하다, 남자도 피해자다... 이렇게 남자들을 위로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남자들을 달래야 한다”는 요지의 주장을 했다. 이는 나 뿐 만 아니라 우리사회에서 여성주의자들이 흔히 듣는 말일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옳고 그름, ‘효율적’인가 아닌가를 떠나, 그 자체로 분석이 필요한 언설이라고 말했다.
나는 강의나 상담 현장에서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남성에서부터 성폭력과 가정폭력 가해 남성까지 다양한 남성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
‘마초’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이들은 모두 내가 칭찬과 격려로 자신을 보살펴 주기를(care) 바란다.
이른바 ‘지혜로운 여자’를 요구하는 것이다.
내가 그들을 ‘위로’하기 전에는, 나의 이야기가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주체는 타자의 인질”이라는 레비나스 의 말을 상기하면서 흠칫 놀라게 된다.

한국사회는 타자들이 직접 말하는 것, 사회적 약자들이 권위적인 언설에 도전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지배 규범에서 벗어나는 ‘다른 목소리’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 남성의 ‘충고’가 결코 ‘대중적 전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여성주의는 5000년 이상 계속되어온 남성 사회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공존하는 사회를 지향한다.
오히려 그러한 ‘전략’은 지나치게 거대하고 비대하며 단일한 기존의 목소리를 더욱 강화시킨다.
또한, 그러한 요구는, 모든 부분에서 여성보다 이성적,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남성들이 성폭력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우리는 성욕을 억제할 수 없다”며 스스로를 동물의 수준에 놓는 것처럼, 남성 스스로가 자신을 여성과 동등한 대화 상대자가 아니라 마치 ‘성장이 멈춘 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내가 강의하면서 가장 당황할 때는,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나의 강의를 “여성주의자가 되라, 저항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경우이다.
나의 주장은 그런 사유 방식과 가장 거리가 멀다. 모든 사람이 여성주의자가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
여성주의는 기존의 세계관에 대한 단순한 ‘안티’도 아니고, 그것을 대체할 수도 없다. “공략하기보다 낙후시켜라”, “착한여자는 천당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는 말처럼, 나는 여성주의가 저항이라기보다는 한 가지 목소리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여성들이 그리고 남성들이 살아남기 위한 협상(negotiation) 수단이라고 본다.
여성주의는 세상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바로 잡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과 여성 모두 자신의 의식과 행동을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인식하고(mapping) 정치화하도록 돕는 것이다.

기존의 (서구 백인)남성 중심의 목소리가 전부라고 믿을 때 우리는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alternative) 세계가 가능하며 그것이 또 하나의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유일(monolith)한 것으로 군림해왔던 기존의 목소리는 급속히 상대화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가 기존의 사유 방식이라면, 여성주의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고 믿는다.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럴 때, 여성 뿐 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도 들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