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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 책 말해요, 찬드라 - 정희진

by eunic 2005. 2. 28.
말해요, 찬드라 - 정희진

정희진의 책읽기>'말해요, 찬드라' 이란주


“여기, 카드 돼요” 나의 이 한 마디에 상대방의 얼굴은 분노와 공포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는 나를 경찰 프락치나 이주노동자 전문 협박꾼으로 생각한 것 같다. 얼마 전 동남아시아인이 운영하는 옷가게에서 내가 무심코 ‘저지른’ 일이다. 가게는 (불법이므로) 신용카드 처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과를 거듭하고 가게 문을 나섰지만 이 사건은 내게도 ‘상처’가 되었다. 뜻하지 않게 가해자가 되고 보니 그간 여성이라는 이유로 내게 무례했던 남성들도 이해가 되고, 나의 ‘피해자 정체성’ 역시 상대화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나의, 혹은 우리 사회의 일상적 감수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내국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억압자가 될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맥도날디제이션(McDonaldization)”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지구화는 미국화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글로벌 경제 시대에 자본은 거침없이 이동하지만 노동의 이동은 자유롭지 않다. 하얀 피부의 부자에 영어까지 잘한다면 ‘글로벌 시티즌’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난민’일 뿐이다. 국가, 인종, 성별, 언어 등 경계의 장벽은 유독 없는 자의 이동에만 가혹하다. <말해요, 찬드라>(이란주 지음·2003·삶이보이는 창 펴냄)는 이주노동자가 그 경계를 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투쟁의 현장 일지다. 10년 넘게 노동운동에 헌신해 온 지은이가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에서 이주노동자와 상담하면서 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에 6년 동안 연재했던 글을 모았다.

생각해보면 이주‘노동자’는 해방후 미 군정기부터 있어왔다. 우리는 백인 영어강사나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는 서구인은 이주노동자라 부르지도 않고, 그들을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노동자와 같은 방식으로 ‘다루지’도 않는다. 박찬호는 ‘민간 외교관’이지만 한국에 진출한 흑인 프로야구선수는 ‘용병’이다. 다름은 이렇게 다르게 해석된다. 결국 이주노동자에 대한 한국사회의 법과 문화는 내면화한 서구 숭배와 혈연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인종주의에 다름 아니다. 미국,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의 고착화는 ‘아류 제국주의’ 가해국으로서 한국의 위치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앗아갔다. 그간의 ‘저항적 민족주의’는 전도된 오리엔탈리즘(self-orientalism)의 그림자였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면서 고통을 듣는 자의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다 그만둬 버릴까, 모른 척하고 외면하고 살면 되잖아…” 이러한 지은이의 고백은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찾고 경청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유혹일 것이다. 견딜 수 없는 무기력, 사회에 대한 분노,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죄책감, 과중한 업무에 혹사당하는 몸….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자신의 투쟁을 정치화, 언어화한 지은이에게 경의를 표한다. 책 제목의 찬드라는 행색이 초라하고 말이 안 통한다는 이유로 경찰이 ‘1종 행려병자’로 처리하여, 6년 4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가뒀던 네팔 여성노동자다. 6년 4개월 동안 찬드라는 무엇을 말했고, 우리는 무엇을 들었을까

여성학 강사 정희진

* 한겨레, 2003. 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