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헬미니악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녀)의 말씀에 대한 남성 제자의 해석이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성서 저자가 여성이라면 이렇게 썼을 것이다. ‘말씀이 있었다’는 말은 관념적이다. 말씀은 관계에서 생산되고 특정한 관계에서만 의미를 획득한다.
의미는 언제나 무엇과 무엇의 ‘사이’에 있다. 말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말 자체가 아니라 해석이고, 이는 누군가의 정신을 통과해야만 가능하다. 토마스 자즈의 말을 빌리면, 동물의 세계에 먹는 자와 먹히는 자가 있다면 인간의 세계에는 정의(定義)하는 자와 정의당하는 자가 있다. 정의하는 자의 입장이 객관이 된다. 원래가 객관성이란 강자의 주관성을 미화한, 강자의 정의(正義)이다.
서구와 비서구, 남성과 여성, 이성애와 동성애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전자의 시각에서 후자가 규정되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이다. 디 아더스(the others), 타자는 글자 그대로 주체 외의 ‘나머지 것들’을 뜻한다. 이성애만이 ‘정상’적인 사랑이라고 간주되는 사회에서 보편적 진리나 객관적 사실이란, 이성애중심주의의 결과이다.
아마 동성애 혐오의 가장 일반적인 근거는 동성애 섹스는 아이를 낳지 못하므로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는 무지와 성서가 동성애를 단죄한다는 믿음일 것이다(전자는 출산, 쾌락, 자기실현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진 인간의 성을 출산에만 한정시킨 것이다). 자신의 논리 부족을 권위에 의지하여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서구 유명 지식인이나 이론을 인용하기 좋아한다. 꼭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일상적인 대화에서 성서를 인용하면 논쟁이 끝나버리는 경향이 있다. 성서에 써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진리라는 것이다.
성서는 정말 동성애자를 증오하고 학대하라고 말했을까 하느님은 이성애자여서 동성애자를 거부했을까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김강일 옮김·2003·해울)의 저자인 미국의 성서신학자 대니얼 헬미니악 신부는, 동성애는 신이 허락했지만 인간이 금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이 소돔 사람들을 벌한 것은 그들이 동성애를 해서가 아니라 이방인을 학대하고 모욕했기 때문이다. 소돔의 이야기가 동성애를 단죄하는 근거로 해석된 것은 12세기 이후부터다. 성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지금처럼 하나의 성적 지향으로서 동성애에 대한 복잡한 이해가 존재하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성서는 여러가지 필사본만 존재하며 원본은 남아 있지 않다. 즉, 오늘날 성서에 근거한 동성애 혐오는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현대인의 이성애 중심적 해석의 산물일 뿐이다.
저자는 성서가 인간의 섹슈얼리티에 관해 어떠한 단정도 하지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사무엘상’의 다윗과 요나단, 다윗과 사울, ‘룻기’의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는 성서가 동성 간의 사랑을 긍정적으로 다룬 사례이다. 구약성서 ‘룻기’의 한 구절,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오늘날 이성애자의 결혼식에서 흔히 낭독되는 이 절절한 사랑의 서약은 사실 여성인 룻이 여성인 나오미에게 바친 헌사였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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