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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한겨레] 책 전쟁과 인간

by eunic 2005. 2. 28.

정희진의 책읽기

전쟁과 인간-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 /노다 마사아키

돌에 부딪친 물이 크고 작은 포말을 일으킬 때 우리는 비로소 물이 흐르고 있었음을 안다. 눈을 감고 돌아다니다가 벽을 만나면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알게 된다. 이처럼 삶에 대한 인식은 삶의 경계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다. 앎은 경계를 만났을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편안한 상태에서 앎은 없다. 경계를 만났을 때 가장 정확한 인지의 표식은 감정이다. 감정이 없다는 것은 사유도 사랑도 없다는 것, 따라서 삶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을 책임이 아니라 영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러한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감수성이다. 자신과 타인의 감정, 고통, 모욕에 둔감한 능력은 ‘리더’의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가 되었다. 아니,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 훈련하는 것은, 단지,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일본의 정신과 의사이자 도시 문화와 현대인의 마음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비교문화학자 노다 마사아키(野田正彰)의 <전쟁과 인간-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서혜영 옮김·2000·도서출판 길)은 삶의 굴욕에 대해 말한다. 이 책은 중일전쟁 시기 난징 대학살에 참가하여 생체 실험, 종군 위안부 동원, 민간 학살을 주도한 일본군 중에서 현재는 평화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참전 용사’들의 일종의 생애사이다. 감정과 죄의식에 관한 뛰어난 에세이로 정신분석, 평화학, 사회심리, 일본학, 역사학, 형법 교정학(矯正學) 분야의 고전의 반열에 오를 역작이다.

한편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 종전 후 50여년이 지났음에도, 이런 책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저우언라이 시대 중국 사회주의의 위대함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일본의 전쟁 가해자들이 ‘해병대 문화’의 수호자가 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죄로서 - 인정하는 것을 넘어 - 인식하며 평화운동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일본군에게 살육 당했으면서도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신뢰와 깊은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한 당시 중국 정부의 관대한 전범 교화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존의 비루함은, 비단 전쟁터에서 살아 있는 인간을 해부하라는 명령을 명령 이상으로 수행하는 책의 주인공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타인과의 감정 교류를 거부하면서 별 뜻 없는 말이나 태도에 “상처받았다”는 말을 연발하는 현대인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 마음의 불사, 즉 감정의 마비가 강함으로 평가받는 현대사회는 그 자체로 군대이며 공포물이다. 저자의 처방은 ‘상처 입을 줄 아는 인간이 되자’는 것이다. 그는 상처받은 마음이 사유의 기본 조건이라고 본다. 감정의 부재는 이데올로기적 질서를 갖게 된다. 명예나 수치와 관련된 감정은 비대하게 발달하는 반면, 자신과 타인의 슬픔과 기쁨의 감정에는 스스로 마취제를 놓는다. 노다 마사아키가 인간의 죄의식에 깊이 천착하는 것은 타자의 슬픔을 감싸안는 문화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황’의 명령으로 강제 동원된 말단 군인도 전쟁의 책임이 있다. 명령한 자는 명령한 자의 책임이 있고, 실행한 자는 실행한 자로서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여성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