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책읽기
<커밍 아웃> 에릭 마커스
모든 물음은 질문하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사고 방식을 반영한다. 질문 내용은 질문자의 입장과 관점을 내포하기 때문에, 물음에는 이미 특정한 형태의 답이 전제되어 있다. 질문은 질문하는 사람의 교양과 예의뿐 아니라 권력을 드러낸다. 왜 여자들이 취업하려고 하지 장애인도 애를 낳을 수 있나 왜 노인이 사랑을 해요 동성애자도 실연 당해요 흑인도 철학 교수가 될 수 있나 (이주노동자에게)왜 굳이 한국에 왔나 이와 같은 말은 남성, 비장애인, 젊은 사람, 이성애자, 백인, 한국인에게는 질문되지 않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할, 혹은 용서받지 못할 욕망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질문은 묻는 자와 답하는 자의 사회적 권력 관계를 반영한다. 여성이 남성에게 ‘왜 취업하려고 노력하나’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어리석을 뿐 아니라 무례한 질문들이 많다. 그러나 <커밍 아웃>(박영률출판사·2000)의 저자 에릭 마커스는 세상에 어리석은 질문이란 없다며, 분통 터지고 모욕적으로 보이는 질문에도 진솔하고 사려 깊게 답한다. 사회적 소수자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상황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쉽다. 사실 그건 당연한 거다. 감정은 정치 의식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치욕과 차별을 여유와 차분함으로 대처하는 것이 반드시 성숙의 증거라고 볼 수는 없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미국의 동성애자운동이 상당히 성숙했음을 느꼈고 부러웠다.
책의 내용은 부제-게이와 레즈비언에게 가장 흔히 묻는 300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 -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 동성애 전문서를 10권이나 집필한 저자의 대표작인 이 책은 연세대학교 동성애자 인권 모임 ‘컴투게더’가 기획, 번역하였고 동성애 인권운동가이자 성 심리학자인 이형석이 편집, 감수하였다. 각 장마다 한국 동성애자의 현실과 정보가 한국 사회 분석과 함께 상세히 실려 있고, 조혜정의 해설도 매우 감동적이다. 동성애는 선택인가(그렇다면 이성애도 선택일까), 에이즈와 동성애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에이즈는 바이러스 때문에 생긴 것이지 성 정체성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동성애자는 성적으로 문란할까(성폭력과 성매매를 일삼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성애자들이다), 동성애는 질병인가요 왜 동성애자가 되었나요…. 세상은 이성애자에게 이런 궁금증을 갖지 않는다.
흑인 페미니스트 벨 훅스는 성차별주의가 다른 사회적 억압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체험하는 지배의 관례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본다. 나는 동성애 차별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이성애중심 사회에서 동성애 차별은 사회구성원 모두가 경험하는 정치적 제도이다. 문제는 동성애가 아니라 이성애‘주의’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성차별주의 없이 작동할 수 없고, 성차별주의는 이성애 제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커밍 아웃은 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간의 상호적인 행위이다. 커밍 아웃은 이성애자에게도 해당된다. 이성애자는 동성애자의 커밍 아웃을 들었을 때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커밍 아웃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성애자로서 자신의 주체성을 상대화하는 계기가 된다.
정희진/여성학 강사 / 한겨레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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