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책읽기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요한 갈퉁
전복적인 평화
통일운동과 평화운동의 차이는 무엇일까. 반미운동은 곧 평화운동일까 인도의 여성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지적대로 반미는 전쟁 집단에 반대한다는 것이지 미국의 아름다운 숲과 나무, 탈식민 이론, 인권운동가에 반대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미군 장갑차에 의해 사망한 두 중학생을 추모하는 촛불 시위의 눈물과 온기는 역사상 전례 없는 모범적인 반미운동이자 평화운동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시위 현장에서 반미 의식을 고양시킨다는 목적으로 미군에게 끔찍하게 살해된 고 윤금이의 주검 사진을 전시하거나 ‘퍼킹 유에스에이’(Fucking USA) 노래를 열창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공포를 느낀다.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이때 촛불 시위는 평화운동이 아니라 여성을 민족의 범주에서 배제하는 남성 중심적 민족주의 운동으로 전락한다.
너덜너덜해진 근대적 이상 가운데 그래도 마지막 남은 희망이 있다면 인권과 평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인권과 평화는 보편성이라는 근대적 사유의 특성 때문에 대단히 논쟁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억압받는 자에게 인권과 평화의 보편적 적용은 칼날이자 칼자루이다. 이라크와 한반도 민중의 삶을 앗아가는 전쟁이, 군수 산업에 고용된 미국 노동자에게는 평화다.
이제까지 보편적인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사회적 약자가 자기 경험을 재현하거나 권리를 주장할 때, 사회는 그것을 ‘폭력’으로 인지하는 경우가 많다. 시위대의 화염병 ‘폭력’과 국가 권력의 진압을 같은 의미의 폭력으로 비판할 수 있을까. 왜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다가 아내가 죽으면 ‘과실치사’로 간주되고, 아내가 정당 방위로 저항하다가 남편을 죽이면 ‘살인’이 되는가. 피억압자의 투쟁은 억압자의 권력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투쟁 과정에서 지배 세력의 가치를 불가피하게 습득하게 된다. 그렇다면 모든 투쟁은 ‘파이 뺏기’에 불과한 것일까.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일상적 폭력이고, 자본주의 체제나 제국주의 전쟁은 구조적 폭력일까. 이 둘은 구별될 수 있을까. 구별된다면, 누구의 필요에 의해 왜 분리되고 있을까…. 논쟁 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딜레마와 쟁점 구도 자체를 뛰어넘는 탁월한 사유의 전환. 노르웨이의 세계적인 평화운동가 요한 갈퉁의 평화학의 결정체,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강종일 정대화 임성호 강승채 이재봉 옮김·들녘·2000)는 그간 소극적이고 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왔던 평화가 새로운 세기에 얼마나 전복적이고 역동적인 사유인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이 급진적인 이유는 혁명적인 대안, 정답을 제시해서가 아니라 대단히 논쟁적인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그렇다.
갈퉁은 현 시기 인류의 삶 자체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할 것을 요구한다. 평화의 관점에서 보면 주류 경제학이든 마르크스주의든 모두 근대, 서구, 남성의 사유라는 점에서 동일한 논리를 갖게 된다.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의 목표는 널리 알리는 것이 아니라 평화 그 자체이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과정과 수단은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 과정이 폭력적이었기 때문에 목적도 의심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그 목적 자체가 모든 이에게 평화가 아니었을 거라는 이야기다.
정희진/여성학 강사 / 한겨레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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