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요부'의 현실과 급진성,『인 더 컷』
<정희진의 영화 읽기>
여성주의 저널 <이프>에 게재
섹스를 원하는 것은 죽음을 원하는 것
『인 더 컷(In the Cut)』의 엔딩 크레딧에는 세 곡의 노래가 흐른다.
이리와 내 사랑 / 나쁠 일은 없어 / 네가 내 팔에 / 안겨 있는 한 / 소리치지 마 / 울지도 마 / 난 널 떠나보낼 수 없어 / 살은 부풀고 / 목은 창백해져 / 내 손톱에 짓이겨져도 / 소리치지 마 / 울지도 마 / 난 널 떠나보낼 수 없어 / 당신 목소린 이제 없어 / 이제 넌 날 상처 낼 수 없어 / 죽음은 사랑의 친구......
두 번째 나온 이 노래를 못 듣고 나간 관객이 많을 것 같다.
“난 널 떠나보낼 수 없어(I just can`t let you say goodbye)”.
이 노래 가사에 의하면, 섹스나 연애에서 여자는 “노”나 “굿바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칫하면, 여자의 “살은 부풀고 목은 창백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남자가 여자를 소유하지 못하는 것은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소유하지 못할 바에야 파괴하는 것이 남자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다.
남자 사회는 섹스를 원하는 여자는 죽음도 원할 것이라고 여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연쇄 살인 사건의 주된 희생자들은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다.
특히, 남자들 간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낮은 계급의 남성들이 ‘매춘’여성을 살해하는 이유는, 남자들이 생각하기에, 그녀들이 여성 젠더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남자들 간의 승패는 언제나 여성의 몸에 실현된다. 성매매 산업에 관련된 여성을 살해하는 것은 ‘부담이 없고’, 사람들의 분노를 덜 산다.
일반 대중들도 연쇄 살인범과 비슷한 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성매매 상황에서 남성 손님의 구타, 강간, 살인에 저항하는 여성운동가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그 여자들은 어차피 그런 걸 각오한 사람들 아니냐”는 것이다.
여성의 섹스가 매춘이든 사랑이든, 남성의 요구가 아니라 여성 자신의 선택일 때, 여성은 목숨을 잃는 것을 포함한 모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얘기다.
관객들이 인터넷에 올린『인 더 컷』영화평들은 대개 ★ 두 개에서 멈춘다. 이 영화가 서울여성영화제 개막작이어서 ‘페미니즘 예술 영화’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 “스릴런데, 시시하다”는 평이 대세다.
예전에 까뜨린느 브레야 감독의『로망스』를 놓고 영화평론가 김봉석과 심영섭의 논쟁이 여기서 재연된다. 거칠게 기억하자면 당시 쟁점은, “왜 여자들이 섹스를 갖고 저 난리냐, 짜증 난다” 對 “여자들에게는 섹스가 중요하다, 남성들은 그걸 이해하기 어렵다”였다.
섹스나 외로움은 그 자체로 대단히 정치적인 문제이고 ‘정치’가 작동되기 위한 전제지만, 한국사회에서 여성주의자가 성을 문제화하면, 남성의 분노와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물론 성폭력이나 가정폭력처럼 성의 피해를 강조하는 것은 그나마 용서가 된다. 하지만 여성의 욕망이나 성욕은 비정치적인 문제, 심지어 탈정치를 조장하는 문제로 여겨진다.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먹고 살만한’ 여자들의 한가한 문제 혹은 ‘서구적 페미니즘’이라는 비난이다. 이런 반응은 ‘여성주의자’ 내부에도 상당하다.
섹스나 외로움이 중산층만의 문제라고 보는 것은, 계급 차별적 편견이다. 이는 역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섹스나 외로움으로 고통 받지 않거나 먹고 살기 힘들어서 고통 받을 자격조차 없다는 말이다.
여성주의에서 성과 사랑이 이론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주제가 되는 이유는, 젠더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섹스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의 정의를 거부하고 스스로 섹스를 정의할 때,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들 20여명을 살해했다는 어느 연쇄 살인 용의자의 실천대로, ‘처벌’ 받게 된다.
여성의 섹스는 스스로 죽음을 초대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섹스는 성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젠더에 대해 말하기와 글쓰기가 생계 수단인 나는 앞장서서 ‘몸(입)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다. 내가 피해 여성이 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없다.
이 사건은 한국사회에 여성의 몸이 소재할 공간이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여성은 섹스로 인해 두들겨 맞고, 직장을 잃고,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목숨을 잃는다. 이런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정치적인 문제란 말인가?
스릴러, 장르는 운명이다?
내가 열광하는 영화들,『여인의 초상』,『스위티』,『피아노』,『내 책상 위의 천사』(모두비디오로 출시되어 있다)의 작가 제인 캠피온의 최신작『인 더 컷』은 스릴러를 표방한다.
하지만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 프래니(멕 라이언)는 자신이 사랑하는 말로이 형사(마크 러팔로)가 연쇄 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지만, 그의 섹스와 따뜻함을 그리워한다. 범인은 말로이의 동료 형사(닉 다미시)였고, 그녀도 희생자가 될 뻔 했으나 살인범을 죽이고 탈출한다.
이 영화는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에 충실하지 않다. 스릴러 영화에 요구되는 복잡한 스토리, 복선이나 트릭, 극적인 반전 같은 것은 없다.
시인 김혜순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인 더 컷』은 장르가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릴러만큼 형식미를 뽐내는 장르도 없지만, 이 영화는 ‘말하는 형식’ 보다는 ‘말씀의 내용’에 포커스를 둔다.
장르의 특성을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목소리’만 큰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주로 남성이 만들어 온 스릴러 영화들은 스토리의 구성미에 주된 의미를 두었지, 이야기 내용의 정치학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는 드라마 장르에서나 중요하지, 액션이나 스릴러에서는 논외의 것이었다. 이처럼 기존의 남성 스릴러는 장르와 이야기를 대립시키며 형식에 집착해왔다.
스릴러 뿐 만 아니라 로맨스, 공포, 액션... 모든 장르의 법칙은 몰성적(gender blind)이어서, 장르 형식을 깨지 않고 여자의 이야기를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 더 컷』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는 “스릴러 형식을 빌러 여성의 욕망을 이야기했다”는 것인데,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인 더 컷』은 스릴러의 형식을 빌린 것이라기보다는, 스릴러에 여성의 언어를 담은 작업은 필연적으로 남성 스릴러의 비정치성을 문제제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다.
남성이 기대하는 스릴러, 남성이 만들어 온 스릴러와 ‘여성주의 스릴러’의 대립은, 영문학을 가르치는 주인공 프래니와 남학생의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프래니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등대로(To The Lighthouse)』를 숙제로 내 주자, 남학생은 짜증내며 말한다.
“이 책, 재미 없어요”, “왜?”, “겨우 노파 하나 죽잖아요”, “그럼, 대체 몇 명이나 죽길 바래?”, “최소 3명은 죽어야죠!”.
섹스보다 권력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영역은 없어
나는 여성학 도서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는데, 가장 반응이 좋은 책은 베티 도슨의『네 안에 아마존을 키워라』이다.
특히, 30대 후반을 넘어선 여성들의 독후감은 열렬하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자유주의 페미니즘, 프로 섹스(pro sex) 입장을 대변하는 이 책에 ‘블레이크’라는 남성이 나온다.
저자 베티 도슨에게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 준 이 남자는 마흔 넘어 직업, 결혼 등 모든 제도권 생활을 청산하고 쾌락과 마음의 평화를 찾아 나선 인물이다. 그는 도슨과 젠더 규범을 초월한 열정적, 탐구적 섹스를 나눈다.
저자는 섹스와 쾌락에 대해 배우는 최선의 방법은 열린 마음의 연인을 만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성애자 여성, 게다가 페미니스트라면, 이 문제는 아주 절박하다. 하긴, 그걸 누가 모르나? 여성들의 괴로움은 가부장제 사회, 특히 한국사회가 그런 남성을 생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블레이크 같은 남자가『인 더 컷』에 나온다.
남자 주인공 마크 러팔로(이 배우는 케네스 로너갠의『유 캔 카운트 온 미』에서 ‘부랑아’로 나오는데,『인 더 컷』보다 더 멋있다).
그는 전화로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위 방법을 알려주고, 여자의 섹스를 위해 기꺼이 수갑을 찰 수 있는 남자다.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은 클리토리스가 무엇인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이 남자는 애인에게 “클리토리스는 섹스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곳”이라고 속삭인다.
그는 외로움에 지친 여자에게 말한다.
“당신이 원하는 거는 뭐든 다 해 줄께. 애무, 근사한 저녁 식사, 환상적인 잠자리, 오럴 섹스... 죽여 달라는 것만 빼고 다 해 줄께”. ‘죽여 달라는 것만 빼고 다 해준다’는 말은 연인들 사이의 흔한 사랑의 맹세지만, 문제는 이 남자가 동생(제니퍼 제이슨 리)까지 죽인 연쇄 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죽여 달라는 거만 빼고”가 아니라, 이 남자를 사랑했다간 죽는 일만 남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남성과 달리 여성에게 ‘번섹(번개 섹스)’, ‘원 나잇 스탠드’, ‘캐주얼 섹스’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고 이성애 가족 제도 밖의 섹스는 살인, 구타, 강간, 협박, 평생의 트라우마, 패가망신이 동반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여성에게 섹스는 억압이자 자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평생 동안 자원이 되지도 않고, 자원일 경우에도 여성이 자기 섹슈얼리티를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가 여자의 섹스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에게 섹스는 생명과 삶 전체를 걸어야 하는 정치적 투쟁의 목표가 된다.
여성이 다른 삶을 모색하거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을 때,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을 때, 성은 이 모든 것들의 변화를 알려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여성에게 섹스는 이토록 중요하다. 섹스가 여성에게 정치적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을 때는 젠더도 작동하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섹스에 묶어두었기 때문에, 여성에게 섹슈얼리티는 자기 혁명의 증표가 되어버린다.
인간 사회가 얼마나 야비한 구도로 형성되어 있는지를 섹슈얼리티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영역은 없다.
요부(妖夫)의 정치적 의미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지금까지, 여성은 남성을 괴롭히는 ‘술, 담배, 여자’ 중의 하나였다.
여자는 술, 담배와 동격이었다.
가부장제 사회가 남성은 성적 주체로, 여성은 성적 대상으로 만든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가부장제 유사 이래 여성은 언제나 성적 주체였다.
‘꽃뱀’의 유혹에 넘어간 남성들의 ‘억울한 호소’들, 초월과 득도, ‘큰 뜻’을 이루려는 남성과 이들을 대변하는 남성 문화는, 여성을 ‘남자 신세 망치는 골칫덩이’로 경멸해왔고 그 혐오의 정점은 ‘창녀’였다.
이처럼 성의 피해자로서 여성과 성의 주체로서 여성은, 남성의 편리에 따라 늘 양립해왔다.
스릴러 영화의 공식, 남자 주인공을 시험에 들게 하는 팜므 파탈(femme fatale), 즉 치명적 요부(妖婦)는 남성의 모순을 여성에게 투사한 존재이기에, 오랫동안 남자 감독들의 사랑을 받아왔다(이는 남성 작가들의 예술적 상상력이 젠더에 의해 제한받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팜므 파탈은, 남성의 성이 저지르는 폭력과 파괴가 결코 남성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남성 환타지의 산물이다.
남성의 성욕은 무한대라서 어디로 ‘분출’될지 모르지만(성의 피해자 여성), 성욕 폭발의 버튼을 누른 사람은 남자 자신이 아니라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성의 유혹자 여성)라는 것이다.
이 때 남성은 오히려, 모든 성폭력 가해자들이 합창하듯이, 유혹자 여성의 ‘피해자'가 된다.
팜므 파탈은 남성의 욕망을 맘껏 해결하면서도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남성은 여성에게 무성적인 존재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면서도, 성적인 문제의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한다.
그러나 팜므 파탈 이데올로기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팜므 파탈을 통해 남성 문화가 진짜 주장하고 싶은 바는, 섹스라는 ‘자연’ 앞에서 고뇌하는 이성(理性)과 문화의 담지자로서 남성과 섹스 밖에 모르는 머리 없는 몸둥아리 자연으로서 여성이라는 성별 이분법의 대비이다.
『인 더 컷』은 이 공식을 뒤집는다. 이 영화에서는 욕망 앞에 고통 받으며 사랑에 빠질까봐 고뇌하는 사람은 여성이고, 매력적이나 치명적인 유혹자는 남성이다. 여성이 유혹자가 아니라 유혹 당하는 사람으로 재현되면, ‘여성도’ 갈등, 사유, 선택, 책임과 같은 인간의 행위를 하는 살아있는, 움직이는, 변화하는 존재가 된다.
행위자로서 여성, 역사적 주체로서 여성, 그리고 여성의 성적인 욕망은 그것을 억압함으로서 유지되는 남성 사회를 위협한다.
여성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그 사회의 경계와 만나고, 그래서 정치적 갈등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로이가 불평하자, 프래니는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원하게 될까봐 두렵다"라고 말한다.
여성이 원하는 것. 낸시 메이어스의『왓 위민 원트(What Women Want)』는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남자들을 다독거리고 있지만, 여성이 원하는 것은 남성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정의되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여성이 원하는 것’은 남성에게 무기력과 수치심을 준다. 프로이드 뿐 만 아니라 대개의 남성들에게 여성은 ‘검은 대륙’이다.
‘검은 대륙’에 접근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남성들이 짜증스럽고 히스테리컬하게 말한다. “도대체 요점이 뭐야!, 원하는 게 뭐야!”
'여성학자 정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겨레] [남자는 달래야 한다? (0) | 2005.02.28 |
---|---|
[한겨레] 책 말해요, 찬드라 - 정희진 (0) | 2005.02.28 |
[여성부발간책자] ‘다른 목소리’ (0) | 2005.02.28 |
[이프] 멜로드라마의 남성 연대 (0) | 2005.02.28 |
[아웃사이더] 가정폭력을 둘러싼 정치적인 것의 정치학 (0) | 2005.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