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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

[아웃사이더] 가정폭력을 둘러싼 정치적인 것의 정치학

by eunic 2005. 2. 28.

가정폭력을 둘러싼 정치적인 것의 정치학


- 진보와 보수는 누구의 전선인가

/정희진

<아웃사이더> 게재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냉정하다.

건조하게 다시 쓴다면, '고정 관념이 사실을 만든다'.

영화 <가스등>에서 잉그리드 버그먼의 분열처럼 성별(gendered) 사회에서 인식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은 늘 '내가 본 것을 믿을 것인가, 남(성)이 말한 것을 믿을 것인가'의 문제로 고통받는다.

처음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자기 검열 없이 '급진적'으로 써도 되냐"고 물었더니, "감당할 수만 있다면 '급진적'인 것이 좋다"는 <아웃사이더>의 답변이 맘에 들었다.
다른 모든 폭력과 마찬가지로 가정폭력은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정치적 검열과 발언 수위를 조절하는 것은 내게 중요한 문제다.
가정폭력에 대해 급진적으로 쓴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쓰는 것일까. 특정한 방식의 질문은 이미 그 질문 방식이 의도한 답을 전제한다. 그
래서 어떻게 쓰는가는 왜 쓰는가와 관련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와 목적은 '가정폭력의 실태와 대책'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대개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은 공적인 문제, 정치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선정적인' 것, 지면 편집 용어로 말한다면 '쉬어 가는 코너' 쯤으로 여겨진다.
나는 여성폭력을 다루는 한국사회의 일반적인 접근처럼,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면서 여성의 비참한 상황과 남성의 비인간성을 폭로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혹은 대책을 논하면서 엄격한 법 집행과 의식 개혁을 주장할 생각도 없다.
이 글은 가정폭력의 실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시각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하여 가능하다면 진보와 보수/전쟁과 일상/좌파와 우파... 등 기존의 정치적 의제 설정 자체가 남성 중심적임을 지적하고, 이 문제가 가정폭력 발생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가 살펴보고자 한다.

손석춘과 가정폭력
좌파에도 급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B급 좌파라는 어떤 남성은 "90년대 주류 페미니즘의 저급한 사회의식"을 비판하면서, 가부장제는 자본주의를 작동케 하는 구조의 일부라고 못박는다.

이와 비슷하게 자신이 '맑시스트'임을 주체하지 못하는 언론인 손석춘은, "역겹다. 페미니즘은 먹고사는데 아무 지장 없는 중산층 여성들의 주장"이라는 정치적 신념을 밝혔다.

모택동, 맑스 모두 중산층 지식인이었지만 언제나 페미니스트만 중산층 지식인인 것이 시비 거리가 된다. 위와 같이 말하는 남성도 중산층 부르주아 '지식인'이며 혹은 자신도 지식인이 되고 싶어하면서, 다른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여성운동가 중 일부가 지식인이라는 사실은 못 견뎌한다.

여성은 '어머니'이거나 '창녀'일 뿐, 지식인이나 중산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런 진보 남성들이 생각하는 올바른/과학적 여성운동은, 여성을 불쌍한 피해자로 재현하여 시혜자로서 남성 주체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희생자화는 타자화의 가장 극단적인 세련된 형태일 뿐이다.

이들의 노골적인 여성 혐오는 남성을 포함한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았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부언일 뿐 아니라, 이들의 주장이 좁은 지면을 나눌 정도로 의미 있는 언설이라고 보지 않기에 자세한 언급은 피한다. 그
러나 위 두 남성의 생각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여성 문제(gender issues)를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의식적 태도와 여성이라는 피억압 집단을 자기 맘대로 재현하고픈 남성의 무의식적 욕망을 모두 대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논의의 재료로 삼을 만하다.
이런 남성의 사고 저류에는 자신만이 보편적 인간이며 절대적 주체이기 때문에, "여성에 대해서는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당위가 깔려 있다.

이들이 저항한다는 계급주의, (혈연적)민족주의, 가족주의, 이성애주의, 인종주의, 오리엔탈리즘, 비장애인 중심주의도 대개는 이런 논리로 작동한다.
이들의 말할 수 있는 권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여성지식인이 장애운동가나 노동운동가에게 그들의 유한(有閑)성을 지적하며 역겹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남성들의 발상 자체가 폭력이지만, 이러한 진술 방식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잡지들도 이처럼 적나라한 인권 침해적 글을 버젓이 실어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페미니즘은 '저항' 이론/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생겨난 지 300년도 안 되었지만, 한국에 자본주의가 '들어온 지' 100년도 안 되었지만, 자본주의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하물며 수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부장제(gender system)의 위력으로부터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타협/생존/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남성의 삶이 인간 경험의 일부이듯,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의 경험도 인간 역사의 일부임을 호소하는 것이다.

베티 프리단'도' 맞는 이유
가부장제는 성별(gender)과 계급 문제를 분리, 대립, 택일해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택일되겠는가?
서구/남성/근대의 이분법적 사고 구조에서는 특정한 억압 A는 언제나 특정한 억압 B로 환원되어야 한다.
즉, 더 중요한 더 근본적인 억압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만이 인식 주체라고 믿는 남성의 생각에서는, 가장 중요한 억압은 자기가 경험한 억압이다.
그 외의 사회 문제는 부차적이고 특수하고 주변적인 것이 된다. 심지어 위에 언급한 두 남성 주장의 실상은, 여성이 당하는 억압과 고통이 (자기가 모르므로) "없다"는 것이다.

젠더 정치의 시각에서 본다면, 좌파와 우파 모두 남성 중심적 정치 전선을 강하게 유지시키려한다는 면에서 이런 류의 진보 남성과 조갑제의 차이는 없다.
좌파 정체성은 진보적 삶의 결과로 (외부로부터)부여될 수는 있으나, 스스로 선언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자신을 좌파로 정의하면서 남성 중심적 계급 정치의 이름으로 여성이 경험하는 억압은 "시시"하거나 없으며, 여성운동가를 "역겹다"고 하는 것은 무식을 넘어 지극히 우파적이다.
즉, 이러한 사고는 기층 계급의 여성운동을 무시하고 성 역할 모델을 중산층에 한정한, 그야말로 부르주아적, 몰계급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매우 소수의 여성들만이 중산층 전업 주부로서, 집안에서 일한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여성들은 가사노동과 임금노동 양 영역에서 남성의 두 배로 일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여성은 두 배로 일하기 '때문에' 대개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자다.

여성주의는 일차적인 사회적 모순이 존재한다는 사고 방식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다. 성별 억압을 전제하지 않은 계급 억압은 없으며, 계급 모순 없는 성별 모순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사회적 억압은 여러 모순이 중첩, 교직(交織)된 것이며 각 개인이 겪는 고통은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르다.
여성이 독자적인 개인, 시민, 인간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한국사회의 구조상 '중산층 부르주아 여성'이 있기나 한지도 의문이다.
여성의 계급성은 그녀 자신이 가진 물적 기반에 의해 정해지기보다는 여성이 맺는 가족 관계, 즉 ('여성을 소유한') 남편이나 아버지의 계급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미국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로 유명한 <여성의 신비>의 작가 베티 프리단도 '매맞는 아내'였다.
그녀는 여성운동 집회에 나가 연설할 때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남편이 때린 얼굴의 푸른 멍을 짙은 화장으로 가려야 했다.
최근 여성 연예인의 가정폭력 피해 사건이 일반인에게 충격을 준 이유 중 하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도 남편에게 10여 년 동안 구타당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가정폭력은 계급 문제로 인한 억압이 아니라 성별 권력(gender) 관계로부터발생하기 때문에 여성이라면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가해자가 피해 여성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기 때문에 남편이 더 큰 피해자라는 황당한,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설득력' 있는 주장도 있었지만, 이는 바로 여성에게는 다른 어떤 사회적 권력보다도 성별 권력이 더 압도적으로 작용함을 보여주는 흔한 예이다.

그래서 여성운동은 "먹고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여성들이 하는 운동이 아니라 "맞아 죽지 않으려는" 여성들의 최소한의 자구책이다.

미국의 시각이 걸러지지 않은 보도라는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최근 어느 시사 잡지는 소말리아 내전에 자원한 여성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녀는 전쟁 상태가 훨씬 살만하다고 말한다.
군인으로서 음식을 배급받고 남편에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가정이 휴식처이고 평화로운 공간이라는 언어는 누구의 경험인가?
여성에게 무엇이 일상이고 무엇이 전쟁인가? 성별을 독자적인 사회적 모순, 정치적 제도로 인정하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진보의 개념을 넓히다?
90년대 후반부터 <당대비평>, <아웃사이더>, <인물과 사상> 등을 중심으로 기존의 거대 담론적 사회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새로운 진보를 역설하는 입장이 많아졌다.
조금 냉소적으로 적확히 말하자면, 예전에는 진보 담론에 끼지 못했던 사회적 소수자 문제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적 약자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논의가 진보 개념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은 것 같다.
사회적 소수자를 정치적 주체로 보고 이들의 고통을 정치적 의제로 설정하기보다는 기존 진보를 '풍부'하기 위해 동원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래서 매체마다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를 다룬 기사들이 그들의 소외와 비참한 상황을 중심으로 양념처럼 등장한다.
?誰맛? 진보 개념을 변화시키기보다는 확대하는 방향으로 소수자 문제가 '활용'된다.
이를테면, "진정한 진보주의자는 이런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기존의 정치 개념을 근본적으로 의심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여성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인정한다 면서도, 가정폭력의 원인을 군사독재 폭력문화의 산물로 본다거나 성매매나 성폭력을 외세 타락 문화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대표적인 모순된 사고이다.
여성 억압은 계급/민족 모순으로 환원되지 않는 남성 지배의 문제, 여성과 남성간 권력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에서는 소위 '일상적 파시즘'과 '구조적 파시즘'이 대립한다. 결국 사람들은 또 무엇이 더 결정적이냐고 결론 내고 싶어한다. 마치 민족 모순이나 계급 모순처럼 '큰' 문제를 우선시 하는 사람은 구조적 파시즘을 강조하고, 소수자들은 일상적 파시즘에 더 무게를 두는 것처럼 논의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일상적 파시즘도 구조적 파시즘도 극복하기 어렵다.
구조적 파시즘은 일상적 파시즘을 전제로 작동하는데, 두 가지 파시즘이 어떻게 구별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모두 소수자이며 모든 사회운동은 부분운동이다. 인간 현상을 거시/미시, 구조/일상, 사회/가정, 정치적인 것/개인적인 것, 공/사, 전체/부분, 보편/특수... 로 나누는 것은 누구의 기준에 의한 것이며, 그러한 구분에서 이익을 보는 집단은 누구인가?

이러한 모순이 가장 첨예하기 드러난 것이 운동사회 성폭력이었다. 여성활동가가 동료 남성운동가에게 성폭력/차별/무시당하는 것은, 기존의 진보 개념으로 치자면 사소한 문제이고 전체(=남성)를 위해 덮어두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여성이 겪는 차별과 억압도 정치적인 문제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 문제는 당연히 심각한 모순이다.
맑시스트든 파시스트든 집에서 설거지 안 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처럼, 운동사회 내부에도 남성 중심 논리가 관통한다. 성폭력 발생은 당연한 귀결이다.
나는 '운동권' 남성이 '일반' 남성보다 성폭력을 많이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더 깊은 은폐 논리와 조직 보위를 강조하는 측면에서는 운동사회에서 성폭력이 빈발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외롭게 제기한 '100인 위원회'에 대해 운동사회는 물론 일부 여성운동가들도 '시기 상조', '피해의 객관성' 운운하며 묵살에 동조했다. 나를 포함하여 그 어떤 여성도 남성의 시선과 권력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문제 발생 5000년, 법 제정 5년
1960년대 여성폭력을 처음 사회적 문제로 제기한 서구에서도 아내에 대한 폭력은 동물 학대보다도 관심이 없었다.
수 천년간 가정폭력의 역사에 비하면 여성 인류에게 지난 30년은 혁명의 시기였다.
한국에서는 1983년 <여성의전화> 라는 여성운동단체 생기면서 사회 문제화되었고 가정폭력방지법도 제정되었다. 그
러나 여성폭력 문제에 관한 한, 법 제정과 문제 해결은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한국의 가부장제 문화를 고려한다면, 현행 가정폭력방지법은 현실을 너무 '앞서가는' 법이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다가 죽이는 것은 '과실치사'지만, 아내가 정당 방위로 남편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다. 한국사회에서는 때리는 남편이 가정파괴범이 아니라, 폭력에서 탈출하는 피해여성이나 이들을 돕는 여성운동가가 가정파괴범이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가정폭력이 범죄가 아니라 일상이며, 일탈적 사건이 아니라 규범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가 발명한 제도 중에서 가장 폭력적인 것은 전쟁이고 그 다음이 가족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시대와 지역, 종교, 인종, 계급, 교육 수준,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를 막론하고 인류가 공통적으로 경험한 유일한 역사가 있다면 그것은 가정폭력일 것이다.
한국은 통계조차 없으나 미국에서 살해당한 여성들의 약 42%는 이전 또는 현재의 파트너에 의해 죽는다.
방글라데시, 브라질, 케냐, 태국은 50%를 육박하며 파키스탄에서는 전통적인 여성 억압 문화인 퍼다(purdah)의 영향으로 80%정도의 여성이 남편으로부터 학대받는다.
볼리비아 정부는 여성폭력 가해자의 95%는 처벌되지 않는다고 보고한다. 미국에서 아내구타는 강간, 자동차 사고, 강도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외상의 이유이며 여성 상해의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라고 여겨진다.
지난 5년 간 미국에서 아내폭력으로 사망한 여성의 수는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미국인의 수와 비슷하며 미국 '소아마비 환자 모금 본부(March of Dimes)'에 의하면 임신 중 남편의 구타가 기형과 유아 사망의 주원인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 기혼 여성의 5%는 남편의 폭력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고 호소한다.
특히 임신중인 여성은 학대 타겟 1순위이다.
미국 휴스턴과 볼티모어에서 저소득층 임신 여성 6명 중 한 명은 임신 중에 폭력을 경험했다.
구타당한 여성의 60%가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임신 중에 3배 이상의 폭력을 경험한다.
멕시코시티에서 무작위로 342명의 여성들을 조사했는데 20%의 여성들이 임신 기간 동안 위(胃)를 가격 당했다.
코스타리카 산호세에서는 남편에 대해 사법적 개입을 요청한 80명의 매맞는 아내들에 대한 연구에서, 49%가 임신 중에 구타당했다고 보고했고 이 중 7.5%가 구타로 유산했다.

한국의 가정폭력 발생률도 형사정책연구원 보건사회부 등 거의 대부분의 조사에서 과반수를 넘고 있으며, 구체적인 피해 상황은 외국 사례와 별로 다르지 않다.
우리보다 여성운동이 활발하고 사회복지시설이 잘 되어 있는 서구의 사정을 고려할 때, 한국의 가정폭력이 더 심각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나는 50%의 여성이 남편에게 맞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할지라도,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해자와 조사자의 폭력 개념이 현저히 다르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뺨 한 대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정도 가지고 남편에게 맞았다고 주장하는 여성은 거의 없다.
성폭력 신고율이 2%인 것과 마찬가지로 가정폭력의 가장 큰 특징은 은폐성과 반복성이다. 가정폭력은 언제나 축소 보고된다.

여성의 사회 진출? - 가정은 사회가 아닌가
나는 가정도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인간 사회인 이상, 폭력이 발생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반대로 가정에는 폭력이 없을 것이라는, 가정은 휴식처(여성에게는 노동의 공간이다)라는 이데올로기가 가정폭력의 은폐/유지/발생 기제라고 본다. 폭력으로 평화로운 가정이 깨져서 문제가 아니라, 폭력으로도 (남성 중심적)가정이 깨지지 않는 것이 더 문제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라는 말은, 여성이나 장애인이 주로 머무는 가정은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한다.
가정은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법이나 민주주의, 정치, 인권과 같은 공적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바람은 집안에 들어가도 법은 들어갈 수 없다는 논리가 이제까지 가정폭력을 방치, 지지하는 논리였다. 물론 이는 허구다.
같은 가정 내 폭력인 아동학대나 노인학대 문제에 대해서는 이러한 불개입 논리를 적용하지 않는다. 또한 호주제, 상속세, 가족 계획의 예처럼 국가가 가족/사생활에 침투하는 논리는 남성 국가의 이해에 따라 선택적이다.
무엇이 사회이며, 사회는 어디에 있는가?
가정과 사회는 다른가?
남편에게 고문당하는 것과 국가로부터 당하는 고문의 내용은,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다른 점이 있긴 하다.
국가 기관에서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 가해자에게 밥을 차려주지는 않아도 되며, 평생 맞는 것도 아니다.
국가 폭력의 가해자들은 아무리 무소 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가정은 치외법권 지대이며 아내를 구타하는 남성들은 광범위한 사회적 이해와 지지를 받는다.
남녀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성 역할 규범이 남편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가정폭력 피해여성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폭력 상황에서도 가해 남편의 권력(='버릇')을 고치고 가정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피해자에게 해결사 역할까지 요구하는 것은 아마도 가정폭력 밖에 없을 것이다. 전쟁, 조직폭력, 학교폭력의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감동시켜 폭력을 멈추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인간은 누구에게나 맞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아내일 때는 예외이다.
그 인간이 여성이라면, 여성이 아내가 되면, 맞지 않을 인간의 권리보다 여성으로서 참아야 할 도리가 더 강조된다.
여성은 너무도 쉽게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가정폭력방지법으로 고소 당한 폭력 남편들은 "(사람이 아니라) 집사람을 때렸을 뿐인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억울해한다.

무엇이 정치적인 문제이고 그것은 누가 정하는가
장애인 인권 운동이 비장애인에게 더 많은 시혜를 바라거나 장애인도 비장애인 못지 않은 능력과 의지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장애인 운동은 우리사회에서 정상이라고 간주되는 몸의 범주에 대한 도전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운동은 사회 안에서 여성의 지위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여성의 시각으로 사회/역사/정치를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의 문제는 기존의 공적 영역 중심의 협소한 정치 개념을 바꾸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양성구유자(hermaphrodite)의 인권이, 인간의 다양한 차이점 중 성차(性差)만을 극대화(sexism)하여 인간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는 양성사회에서는 논의조차 될 수 없듯이, 여성 문제는 정치적 문제로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이제까지 여성은 역사 밖에, 여성 문제는 정치 밖에 존재했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등 기존의 정치 전선 자체가 남성의 기준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기수 '선생님'(남성은 역사의 주체?), 정신대 '할머니'(여성은 역사의 피해자?)라는 언설처럼 정치의 행위자는 언제나 남성으로 상정된다.
여성의 고통은 그 여성을 소유한 국가간 민족간 남성간 갈등의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언제나 여성과 남성간의 정치가 아니라 남성과 남성의 정치로 환원된다. 제주도 우근민 도지사의 성폭력 사건은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싸움으로, 정신대나 기지촌 여성 문제는 식민지와 제국주의의 갈등으로 간주되는 식이다.
남성과 남성의 갈등은 당연히 정치이고 역사라고 여겨진다.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폭력, 미국의 이라크 침략 등 남성이 남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억압이고 이에 대한 저항은 투쟁이다.
그러나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개인적 문제이거나 집안 일, 혹은 기껏해야 '격렬한 로맨스'로 간주된다.
여성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력 피해자가 여성일 때 피해는 언제나 사소하다. 여성폭력은 '남편이 총을 쏘면 신고하라'는 말처럼, 희생자 그것도 심각한 피해자가 가시화 되어야만 사회적 관심사로 부각된다.
가정폭력은 해결하려는 노력이 활발하면 할수록 사건이 증가하는 특성이 있다.
여성운동이 활발할수록 문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는 가정폭력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익숙한 렌즈, 즉 남성의 시각으로는 보이지 않는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 매체를 통해 가정폭력의 극단적인 사례만이 재현되는 것은, 그들의 고통이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확실히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맞아라, 우리는 이 정도라야 믿는다'라는 사회의 메시지인 것이다.
가정폭력은 피해가 명백히 가시화 되어야만 '진실'이 되기 때문에, 문제 해결은 피해 이후에 논의된다.
여성운동가들이 가정폭력이 사회적 문제임을 주장하기 위해 심각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여성들이 가정에서 당하는 폭력은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되므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 위해서는 피해가 끔찍하고 심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가정폭력을 성격장애나 빈곤, 스트레스, 알콜 문제 등 '특수한' 부부 관계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폭력 당한 아내의 고통은 한국사회 구조에서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매맞은' 아내들이 고통을 표현하는 행위는, 그들의 고통에 의해 유지되어 왔던 가부장제 가족 제도의 효율적 작동을 위협한다.
그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안식처 가족의 신화, 보호자 남성의 신화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고통 경험은 평등하지 않다.
어떤 고통의 경험자들은 존경받지만, 어떤 고통의 경험자들은 '더럽다'고 추방되고 낙인찍힌다.
가정폭력은 인정되지 않는 고통, 믿을 수 없는 고통이다. 정치적이고 공적인 장에서 인정되는 고통과 달리 재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지 못한 타자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폭력 당하는 여성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담론 구조도, 그들을 지지하는 공동체도 없다.
그들의 고통은 가족의 문제가 되거나, 자녀의 고통이 강조될 때만 부수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래서 고통을 인내하는 여성들의 능력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왔고,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 자체에 죄의식을 느낀다("나는 왜 참을성이 없을까").

가정폭력은 다른 폭력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이다. 그러나 가정폭력 사건이 신문의 정치면 기사에 나는 일은 없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뉴스가 아니어서 일수도 있고, 여성이 맞는 것은 너무도 흔한 일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가정폭력은 인간의 범주, 가족 이미지, 인권, 정치, 권력, 여성 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 문제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새롭게 다루어지지 않는 한, 대책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