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성

송경아의 책읽기 [내셔널리즘과 젠더]

by eunic 2005. 2. 25.
송경아의 책읽기

전시 일본의 여성 지위 '국민' 아닌 '2류시민'


내셔널리즘과 젠더 / 우에노 지즈코

1990년대 초반 어느 봄날, 나는 여성학 강의실에서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때는 몇몇 운동권 여학생들을 빼놓으면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여성학 시간인데도 거의 발언을 하지 않았고, 수적으로도 우세한 남학생들이 훨씬 활발하게 토론을 주도했다.


그날의 강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남학생들의 불만이 상당히 거세게 표출되었던 날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많은 남학생들이 손을 들고 '남자는 군대에 가는데 그 정도 사회적 특혜는 주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발언했던 것이 기억나는 걸 보면. 나는 심호흡을 하고 손을 들었다. 그리고 "남자가 군대를 국가적 봉사라고 생각한다면, 여성의 출산도 국가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필수 불가결한 봉사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아직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주의와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불거지기 전인 90년대 초반. 그런 식으로 문제를 사고해본 적이 없었던 남학생들은 허를 찔려 잠시 조용해졌고,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논거는 기억나지 않지만 교수님은 약간 눈살을 찌푸리시며 '그 두 문제를 병치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출산이 여성의 숭고한 의무이자 끝없는 기쁨이라고 암묵적으로 합의되어 있던 그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군대 갔다 온 자랑만큼이나 남성 중심적이고 불합리하다고 막연히 느끼고 있었던 대학생이었고, 교수님은 실제로 출산과 육아 과정을 겪어본 분인 만큼 군대와 출산이 등치되는 것이 얼마나 부정확하고 해로운 일인지 직감적으로 느끼고 계셨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교수님이 옳았다. 몇 해가 지나 통신 공간과 인터넷에서 그런 논쟁들이 더 지리멸렬하게, 더 지겹게 되풀이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때 내가 내뱉었던 말들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물론 군대/출산의 담론 경쟁은 강의실 담 밖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고 그때 내가 말한 바에 영향 받은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내 입으로 군대와 출산을 등치시켰던 기억과 후회는 그런 논쟁을 볼 때마다 잘못 삼킨 가시처럼 마음 어느 구석을 쿡쿡 찔러댔다. 아울러 국가와 사회, 군대, 여성에 대한 막연한 고민도 깊어갔다.


우에노 지즈코의 〈내셔널리즘과 젠더〉(박종철출판사)는 내 그런 고민을 상당 부분 되돌아보게 해 주고 풀어주었던 책이다. 국민 개병제라는 총동원 체제를 취한 전시 일본에서, '2류 시민' 인 여성이 '국민'으로 인정받으려 안간힘을 쓰며 취했던 '참가형'과 '분리형' 전략은 지금 여기 한국 여성들의 개별적인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라면서 남자아이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보았거나 '공주님' 대접을 받으려고 새침을 떨어본 기억이 아예 없는 여자아이들이 과연 어디 있을까.


그런 투쟁 속에서 여자아이들은 이른바 ?사회인?이 되어 사회에 편입되지만, 그 사회는 여전히 국적으로부터도, 가부장제로부터도 자유롭지 않다. 우리 사회의 '여자들'은 이승연에 분노하고, '아버지의 딸'인 박근혜에 투표할까 말까 망설이게 되고, 여성광역선거구제에 분명한 찬반을 표하기 어렵다. 우에노 지즈코는 "국민 국가에 대항하기 위해 고정된 여성의 본질을 상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아직 '여성'이란 고정된 본질이다. 벗어나기 어렵다.


송경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