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녀’를 위해 사창가를 허하라?
여성주의 저널 '일다' 문이정민 기자
조선일보 사설 ‘속, 영자의 전성시대?’
2007년부터 단계적으로 사창가를 없애겠다는 정부방침에 대해 ‘논란’이 많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언론과 포주가 ‘논란’을 만들고 있다. 정부의 방침에 반발하는 포주들의 입장을 비평 없이 전면에 싣는 것도 모자라 각종 사설을 통해 ‘성매매’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최근 정부가 사창가를 단계적으로 없애겠다고 밝혔다. 윤락업계는 "영업을 합법화해 달라"고 요구하지만 정서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다. 오죽하면 이런 정책이 나왔을까마는 그 효과에 대해선 의문을 품는 사람이 적지 않다. 눈에 보이는 집창촌만 없어질 뿐, 성을 물신화(物神化)하는 남성 위주의 사회풍토에서 성매매의 수요, 공급은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란 시각이다. 매춘부 출신인 니키 로버트는 92년 영국에서 출간된 '역사 속의 매춘부들'에서 이렇게 통박했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 운동가들조차 자신들을 없애야 할 대상으로만 보고 있다고….” (중앙일보, [분수대] 집창촌, 2004- 04-05)
'모든 여자는 일생에 한번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신전 앞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낯선 남자와 성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문을 인용하며 시작하더니, 각국 ‘성매매’ 역사를 줄줄이 늘어놓던 사설은 결국 ‘여성운동가 대 매춘여성’ 구도로 끝맺음 하고 있다.
‘영업을 합법화해 달라’는 요구는 ‘정서상’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성에 대한 도덕적 잣대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요구가 기본적으로 포주들의 ‘권리’만을 담아내고 있으며 반인권적인 착취구조를 용인하기 때문이다. “성을 물신화하는 남성위주의 사회풍토”를 거론했다면 당연히 그런 사회에서 고통 받는 여성들의 인권을 논해야 할 일인데, 이 사설은 결국 ‘성매매’는 어차피 막을 수 없다는 편의적인 주장을 위해 책 문구를 인용하면서 성매매를 반대하는 여성운동가의 목소리를 ‘도덕주의자’로 왜곡하고 있다.
조선일보로 넘어가면 이런 논조는 보다 솔직해지고(?), 직접적이며 선명해진다.
“그 틈새로 공창제가 고개를 든다. 숨어서 가슴 졸이느니 드러내 영업할 것이며 붙잡힐 것 염려하여 가없이 망보느니 이름 밝혀 등록하고 나라에 세금 내 떳떳이 장사하자는 논리 말이다. 얘기가 이쯤 되자 초지일관 도덕률로 중무장한 여성계와 운동단체들은 천부당 만부당, 언어도단이라 외치며 매매춘 없는 그 날까지 투쟁, 투쟁 한길로 나아가자고 줄기차게 외친다. 국가가 어디 할 일이 없어 매매춘을 합법화하겠으며 지자체가 무슨 힘이 남아돌아 몸 팔고 살을 사는 사람들 걱정까지 해야겠냐는 반론이 힘을 얻는다.” (조선일보, [박종성] ‘속, 영자의 전성시대?’, 2004-04-10)
조선일보는 무턱대고 ‘공창제’를 들이밀면서 성매매에 반대하는 여성계를 “초지일관 도덕률로 중무장”하고 있다고 비꼬고 있다. 마치 ‘공창제’가 성매매 되는 여성들을 위한 현실적인 대안이라도 되는 양 논하고 있다. 게다가 집창지를 폐쇄하는 것이 마치 “몸 팔고 살을 사는 사람 걱정까지 해야겠냐”는 비인간적인 논리에 기인한 것인 양 호도하고 있다. 그러나 “숨어서 가슴 졸이느니 드러내 영업”은 누가 하며, “붙잡힐 것 염려하여 가없이 이름 밝혀 등록하고 나라에 떳떳이 세금 내 떳떳이 장사”는 누가 하는가. 바로 ‘포주’다.
현재 집창지, 즉 사창가는 가장 악질적인 ‘아가씨 장사’가 성행하는 곳이다. 인권유린 실태가 가장 심각한 지역이라는 얘기다. 여기 모여있는 여성들은 한번 발 담근 후 결코 빠져나갈 수가 없다. 쇠창살에 가둬진 채 포주들의 감시에 시달리며 숨쉴 틈 없이 몸을 대주고, 맞고, 팔려가고, 옴짝달싹 할 수 없이 묶여있는 여성들 말이다. 그러니 일단 가장 상황이 심각한 사창가를 중심으로 포주들의 착취구조를 감시하고, 그 구조 안에 묶여 있는 여성들을 구제하자는 것이 ‘집창촌’ 폐쇄 정책의 핵심이다.
집창지를 폐쇄하겠다는 것은 여성들을 여기저기 돌려먹는 포주들의 잔인한 착취구조에 일차적으로 메스를 대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여성들에게 살 공간과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시스템일 것이다. 그런데 사창가 폐쇄를 도덕주의의 발로로 보면서 “떳떳이 장사하자”는 논리로 ‘공창제’ 운운하는 저 용감한 필자의 주장은 결국 포주들의 권리, 즉 여성들을 더 유입해 편하게 팔아먹을 권리를 인정하자는 얘기다.
“‘매매춘’이란 말만 나오면 자빠지도록 흥분하는 인사들이시여. 그대는 아는가. 아무리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세상 아무 데도 없는 이들이 수만이요, 무어라 따로 할 일 없는 자 수십만이 넘는다는 사실을. 꽃꽂이 배우고 미용기술 익혀도 몸에 밴 게으름과 해 뜨면 졸린 몰골이 밤만 되면 여왕벌처럼 변하는 저 거짓 같은 세월을 사는 자가 이미 헤일 수 없이 많음을.” (조선일보, [박종성] 속, 영자의전성시대)
화려하고 느끼한 어구를 늘어놓으며 한다는 소리가 결국 '게으름이 몸에 밴’ 여성들이 갈 곳은 사창가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런 여성들은 사창가에서라도 받아줘야 먹고 살지 않겠느냐는 매우 ‘시혜적인(?)’ 관점이다. 집창지는 “밤만 되면 여왕벌처럼 변하는” 여자들이 모인 곳이 아니다. 사창가는 가출청소년들의 유입이 많은 곳이다. 그들은 ‘끼’를 주체 못해서 그리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미성년 여성으로 마땅히 갈 곳이 없기 때문에, 돈을 벌 길이 없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유일하게 그들을 받으려고 안달하는 사창가로 발 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성들은 이십 대가 되고 삼십 대가 되도록 빠져 나오지 못한다. 이것이 명백한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본다면 이 사회의 노동구조, 여성들의 노동권으로 접근할 일이 아닌가. “돌아갈 세상”을 만들어주는 것이 상식 아닌가. 그런데 현실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그 여성들, 계속 거기 있게 해주는 게 마치 대단한 현실이해를 바탕으로 한 처사라도 되는 양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여성들 먹고 사는 그곳을 폐쇄하자는 여성계는 성매매 피해여성들을 “걸레라 욕하며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이 된다.
“그렇게 망가진 인생, 어차피 그네들 몫이라 몰아세우지 말자. 누가 만든 창녀촌인가. 역사가 만들고 외세가 끌어들였으니 내 탓은 아니라고? 이제는 더 더럽힐 수 없는 조국강토이니 모조리 쓸어내자고? 그러는 당신들은 화장실에서 방귀 한번 뀐 적 없이 허구 헌 날 깨끗하기만 했는가. 자초했든, 꼼짝없이 당했든 그런 인생살이 수도 없이 많은 데 그들을 ‘걸레’라 욕하며 나 몰라라 한다면 그건 정말이지 비겁의 전형이다. 게다가 여성부장관 이하 이 땅의 윗전들은 통과된 법이 실효를 거두면 그들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까지 내다본다. 그럼 나머지 절반은 그대로 죽으라고?” (조선일보, [박종성] ‘속, 영자의 전성시대?’, 2004-04-10)
도대체 누가 누구를 ‘걸레’라고 불렀던가. 남성들이 흔히 여성에게 들이대는 잣대 아니던가. 순결하지 못하게, 정조관념 없이 여러 남자들과 자는 여성에게 곧잘 ‘걸레’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던가. ‘인생살이’, ‘조국강토’ 운운하며 시 읊고 앉아있는 바로 그 알량한 머릿속에서 나온 남성중심적 각본 아닌가.
여성계 및 시민단체가 성매매 관련 정책을 고민하는 것은 성매매 여성들이 더럽거나 부도덕하기 때문이 아니다. 살벌한 착취구조 안에서 벗어나지 못해 불에 타 죽어서야 발견되는 성매매 피해여성들이 엄연히 이 땅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곳이 사창가다. 그런데 어떻게 “자초했든, 꼼짝없이 당했든 그런 인생살이 수도 없이 많은데”라는 팔자 좋은 말로 인권유린의 실태를 불구경 하듯 바라보고 있는가. 그것이야말로 “비겁의 전형” 아닌가.
“널어놓은 팬티 한 장 마를 겨를도 없이 덮쳐오는 사내들을 지천으로 받아야 하는 이 나라 창녀들의 얼얼한 아랫도리 사정을 고매한 ‘님’들께서 알아야 얼마나들 아실리오. 표 타령으로 날이 새고 표 관리로 날이 지는 이 봄날, 약 기운 퍼지지 않으면 삼십 분도 잠들지 못하는 이 나라 꽃순이 사정을 국회의원 오빠 언니들이 어디까지 헤아려줄 가슴이 있더란 말인가. 아니 새롭게 국회의원 한번 해보겠다고 길 나선 ‘저들’ 또한 속타고 애간장 녹는 이 바닥 사정을 어디까지 알아차릴 일이겠는가. … 여느 후보보다 깨끗하고 누구보다 할 말 많을 이 땅의 창녀들이 왜 후보를 못 내겠는가.” (조선일보, [박종성] ‘續, 英子의 全盛時代?’, 2004-04-10)
‘얼얼한 아랫도리 사정’ 운운하는 허접스러운 표현상의 문제는 차치하자. 성매매 피해여성들의 현실에 대한 시나리오를 멋대로 만들더니, 총선정국을 앞둔 국회의원 비판까지 하는 모양새를 보자. 가장 ‘바닥’의 민심을 논하려니 ‘창녀’만큼 적당한 소스가 어디 있으랴. ‘창녀’가 여느 후보보다 ‘깨끗하다’고 표현하는 것만큼 따끔한 비유가 없으리라 만족했을 것이다.
“온 나라 구석구석 ‘태극기 휘날려도’ 영자의 방에서 펄럭이는 건 오직 때에 찌든 커튼 한 장뿐이다. 얼룩진 커튼이야 빨기라도 하련만, 갈가리 찢겨진 영혼의 조각들은 어느 한군데 기워 이을 데도 없다. 누구나 억울하면 모여서 피켓 들고 흩어져 소리치는 시위 만능의 세상이지만 그 흔한 데모 한번 못해보는 그네들이다. 그들은 세상 향해 말도 못하는가. 그렇담, 지하의 마르크스가 양에 안차 하더라도 길은 이제 더 없다. 이 땅의 몸 파는 이들이여, 단결하라!” (조선일보, [박종성] ‘續, 英子의 全盛時代?’, 2004-04-10)
‘갈가리 찢겨진 영혼의 조각’ 운운하며 성매매 피해여성들에게 연민의 눈빛을 던질 것 없다. 억울해도 ‘몸 파는 더러운 여자’라는 가부장적 시선 때문에 세상 향해 말 못하는 여성들을 동정하며 선동할 것도 없다. 인생살이 그러하고, 그렇고 그런 여자들 갈 곳 사창가밖에 없다는 그들의 위선에 장단 맞추려고 성매매 피해여성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남성들은 성매매에 반대하는 여성주의자들을 ‘깨끗한 여자’라고 비아냥 거리며 도덕주의자 혹은 순결주의자로 매도한다. 성매매와 성관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그들은 성매매를 반대하는 것이 단지 ‘폭력’에 반대하는 아주 기본적인 전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성이 성적인 자기권리를 가져야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창녀’를 욕하고 질타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래를 보지 못한다고 여성주의자들을 욕하기 위해 ‘창녀’ 편에 손을 든다. 그리고 그 연민이 대단한 휴머니즘이라도 되는 양 유세를 떤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간단히 잊어버리고 가장 밑바닥에 있는 그 여성들과 눈을 맞추고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정작 그들에게 ‘현실’은 없다.
그들에게 단 한마디만 하고 싶다. 제발, 여성을 위하는 척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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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ww.ildaro.com[일다 2004-04-19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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