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승연 누드는 실패했는가를 고찰한 김종엽 교수의 한겨레 기고 글입니다.
여자와는 다른 남자의 시각에서 이승연 누드를 풀어나간 이글은
이승연 누드의 향유자가 남성이 아니라 일본남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한국남자는 점유할 수 없었다고 결론 내립니다.
한국 남자들이 견딜 수 없는
이렇게 말하면 무슨 파격적인 주장이 나올 것이라 예상하는 이도 있을 터이지만 그런 것은 전혀 아니다. 이 사건에 대해 내 나름으로 관심 가는 문제에 대해 논하고 싶을 뿐이다. 내게 관심이 가는 일은 왜 이승연씨의 누드는 이전의 수많은 다른 누드 혹은 포르노그래피와 달리 폐기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승연씨 누드의 유포를 막은 직접적 주체는 그로 인해 정신적 상처를 입게 된 ‘할머니들’과 정대협이지만, 남성들 또한 그들의 분노에 동참했는데, 이는 누드 유포를 막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이전에 연예인들의 알몸 혹은 그들의 사적인 포르노그래피가 유통되었을 때, 사회적 담론의 수준에서는 비난이 격렬해도 남성들의 소비는 왕성했던 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렇게 남녀가 모두 이승연씨 누드를 비난했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 남녀 간에 문화적 일치가 있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똑같이 이승연씨를 비난해도 남녀는 서로 다른 코드 속에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들, 그리고 ‘할머니’들이 이 문제에 대해 격한 감정을 가지는 이유는 ‘할머니들’의 경험이 재현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할머니들’의 경험을 재현하는 것, 거의 재현 불가능해 보이는 압도적 고통을 되살리고 그것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야말로 ‘할머니들’과 정대협이 추구해 왔던 일이다. 문제는 이승연씨의 누드가 고통 받은 피해자의 발언을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인 남성의 시선을 유도하며 그것을 통해서 수익이라는 향유를 이끌어 낸다는 점이다. 이 자본의 향유는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남성들에게서 이승연씨의 누드는 다른 의미에서 견딜 수 없는 것, 누릴 수 없는 것이다. 흔히 이야기되듯이 누드 혹은 포르노그래피는 성적인 현상일 뿐 아니라 지배의 현상이다. 그것은 지배가 가능케 하는 성적 향유를 재현한다. 하지만 정신대를 소재로 한 누드의 경우 그것을 바라보고 누리는 주체의 시선의 자리는 남성 일반의 자리가 아니라 일본 남성의 자리가 된다. 그것은 우리 사회 남성들이 점유할 수 없는 자리이다. 더 나아가 이승연씨의 누드는 향유는커녕 우리 사회 남성들에게 견딜 수 없는 오점을 상기시킨다.
민족국가의 구성은 혈통의 원리를 피하기 어렵다. 그리고 혈통은 성관계를 전제한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의 구성은 항상 섹슈얼리티(성애) 내지 젠더(성) 문제와 매개된다. 근대 민족국가는 남성들 간의 형제애적 동맹을 통해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구축하는데, 이 동맹의 원천은 남성 시민 간의 공정한 여성의 배분이다. 그런데 이민족의 지배는 이 구도에 균열을 가한다. 식민지 경험은 남성들에게 그 자신이 착취당했다는 경험과 더불어 무력하게도 지배 민족에게 자신의 ‘누이’를 성적 향유의 대상으로 넘겨주었다는 자책감을 남긴다. ‘정신대’는 이 자책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오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 성노예를 소재로 한 ‘누드’는 우리 사회 남성들에게 향유 불가능한 대상, 누리려는 행위가 고통을 유발하는 대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들은 ‘정신대’를 재현 불가능한 대상으로 묶어두고 싶은 것이다.
이승연씨 누드 파문은 일단락되었지만, 젠더와 더불어 민족국가를 그리고 민족국가와 더불어 젠더를 남녀가 함께 새롭게 사고해야 할 필요는 남아 있는 것 같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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