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영화와 인문 / ‘가족이라는 운명’은 없다
4. 김태용<가족의 탄생>(2006): 가족, 혹은 어긋남의 자리
/ 김영민 철학자
1. “시나리오를 쓰는데 자꾸만 어떤 한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와 관계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지더라구요. 예를 들면 그 딸의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일까. 그 남자친구의 부모는 어떤 사람일까. 이런 식으로 말이죠.”(김태용) 바로 이런 게 세속(世俗)의 형식이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의 그물처럼, 그 누구도 감히 벼리가 될 수 없는 거대한 그물망의 얽힘이 세속입니다. 자신만을 주인공으로 삼아 무대 위에 올리는 짓이 환상이라면, 세속은 그 환상들이 타인의 환상들과 접붙어 이루어가는 환멸들의 관계와 구조입니다. 마침내 ‘주인공’ 따위가 없어지는 구조, 그것이 세속인데, 그런 점에서 <가족의 탄생>은 제법 세속적입니다. 2. 다음 주에는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2005)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물은 0도나 100도에 이르면 숨어 있던 임계점을 보인다. 얼거나 비등하면서 ‘물’이라는 임시적이며 유동적인 체계가 허물어지고 고체나 기체로 변하는 것이다. 세상살이를 체계의 관점에서 살필 때에는 이처럼 임계점을 규정해보는 일이 중요하고 흥미롭다. 일부의 체계이론가들은 임계점을 잣대로 삼아 ‘열린 체계’와 ‘닫힌 체계’를 구별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닫힌 체계란 임계점에 이르지 않고는 바깥과 상시적인 접촉과 융통이 불가능한 체계를 가리킨다.
건강한 체계는 외부 환경과의 일상적 소통과 교환을 나누는 여러 채널을 확보하거나 재생산하는 법이다. 내부의 체증이나 외부의 침탈이 있어야만 비로소 열리는 체계는 결국 그 개방 자체와 함께 불행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가이아나 인민사원사건이나 오대양 사건 등 집단자살 소동을 일으킨 여러 성격의 폐쇄적인 조직들이 좋은 예증이다. 남녀가 만나 이루는 가족이라는 제도도 하나의 체계이긴 마찬가지인데, 이 경우 사랑과 개방이 반비례한다는 통속적인 역설이 가족의 불행한 비밀이다. 가령 질투는 연애(사랑)에 근거한 관계의 체계적 배타성의 징후인 셈이고 이 배타성은 가족제도 속으로 고스란히 이전된다. 사랑이 달콤할수록 그 배타성(질투)은 깊어지곤 하지만, 마치 ‘호의가 지옥으로 가는 길’(마르크스)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어렵듯이 바로 그 달콤한 배타성의 부메랑은 코앞에 닥쳐도 알 수가 없는 법이다.
사랑과 혈연으로 무장한 가족의 배타적 동일성이 주는 이익은 단기적이며 우연적이고 경험적(일회적)이다. 그 모든 달콤한 것은 속히 썩는 법! 그러나 사랑은 그 완악한 통속주의 속에서 배타성이 주는 달콤한 이익을 오인한다. (정신분석의 대중적 파급 이후, 사랑은 오직 오인 속에서만 성립한다는 주장들은 결코 낯설지 않다.) 그래서 가족과 사랑은 자연스러운 게 되고, 마냥 영속되리라고 전제하며, 운명적인 힘에 의해 조형된 것이라고 확신하고 만다.
그러나 가족은 자연적인 것도, 더구나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김태용의 <가족의 탄생>이라는 타이틀처럼, 가족이라는 제도는 역사 속에서 그 기원을 어낼 수 있을 정도로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탄생은 늘 속되고 잡되다. 그것은 자의적인 제도에 의지하면서 지속되고, 아무 운명도 아닌 우연들에 의해 묶이고 풀릴 뿐이다. 물이 0도에서 얼면서 그 본질의 한 대목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처럼, 가족은 그 가족이라는 제도의 0도를 보이는 순간에야 그 가족의 본질을 슬핏 드러낸다.
제도의 0도 속에서 발설되는 가족의 본질은 “너 나한테 왜 그래?/ 넌 나한테 왜 그러는데?”와 같은 문장으로 거듭 발설된다. 이 문장은 세속의 어긋남, 혹은 세속이라는 어긋남을 가장 통속적으로 드러내는 신호와도 같다. ‘결코 두 사람은 똑같이 사랑할 수 없다’(플로베르)는 사정은 쉽게 잊혀지고 ‘사랑을 준 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롤랑 바르트)는 투정만 늘어가는 것, 그것이 세속의 애정이자 세속의 가족이다. 낯설게 들리겠지만, 오인하므로 관계는 유지되고, 되레 어긋나므로 새로운 관계는 생성되는 것이다.
가족은 역사 속에서 ‘탄생’한 제도일 뿐 자연적인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누이와 동생, 남자와 여자, 엄마와 딸은 서로 묻는다. “너 나한테 왜 그래?” “넌 나한테 왜 그러는데?” …영화는 그 지목하는 손가락들이 어긋나는 자리로서의 가족을 이야기한다
누이(미라)와 동생(형철)은 오랜 격조 끝에 재회하지만 그 재회의 반가움은 짧고 위태롭다. 생활양식을 나누어 갖지 못한 반가움은 ‘소망의 자의적 충족’(프로이트)이라는 뜻에서 대체로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기억에 기대는 반가움은 그 기억 속의 관계를 냉철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법이다. 특히 관계는 노릇이라기보다 오히려 버릇인데, 노릇에 의지하는 반가움은 결국 한갓 풍경으로 끝나버리고 그 풍경의 이면을 이드거니 견뎌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그 어긋남에서 어김없이 다시 묻는다. “너 나한테 왜 그래?/ 넌 나한테 왜 그러는데?” 말하자면 누이 노릇, 동생 노릇, 부모 노릇, 애인 노릇 등은 관계의 실상이 아니라 껍질에 가깝다. 반가움의 풍경이 끝나기가 무섭게 갖은 버릇들은 제 영토와 봉록을 고집한다. 마치 시체 속을 누비는 하아얀 구더기처럼, 그 버릇들은 스스로를 ‘하아얀 것’으로 표상한 채 언죽번죽 설쳐대면서 관계와 노릇의 환상에 송송 구멍을 낸다. 김태용은 “창작자의 딜레마 중 하나가 의도에 매몰되는 것인데, 의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효과가 중요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한 바 있지만, 그것은 비단 창작자만의 딜레마가 아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어긋나는데, 그것은 그가 무엇보다도 ‘의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경은 엄마(매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엄만 도대체 왜 그러는데?/ 넌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데?”라는 치명적인 대치는 사사건건 계속된다. 그러나 이해는 공짜로 찾아오지 않는다. ‘이해는 은총’(마르틴 부버)이라는 주장에 이르면 다소 수상쩍어 보이겠지만, 여러 학자들의 지적처럼 이해를 단지 인식론적 수확으로 여기는 태도는 시대착오적이다. 이해는 제 나름의 비용을 치른 후에야 의도와 어긋나면서 뒤늦게 찾아오는 법이다. 엄마가 죽은 후에 그 유품을 뒤적거리는 선경에게 이해의 빛은 느닷없이 스며든다. 급기야 세월의 비용을 치른 선경은 ‘엄마는 구질구질한 게 아니라 정이 많으셨던 거야’라고 엄마를 변명하는 데 이른다. 경석은 애인인 채현의 생활양식이나 버릇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해주지 않고 주변에 선의를 분산시키는 채현이 ‘헤픈 여자’로만 보인다. 자신이 채현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의심은 깊어간다.
가족은 가령 자본주의나 아동기처럼 역사의 곡절 속에서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며 영속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발가벗은 일상 속의 그것은 한갓 허약한 제도인 탓에, 국가나 기업은 권력과 화폐로 지원하고, 종교나 도덕은 이데올로기와 환상으로 보위한다. 할리우드 영화들이 강박적으로 증명하려 하듯이 남김없이 가족주의로 귀결하는 가족서사들은 거꾸로 가족이라는 제도의 허약함을 웅변한다. 김태용의 <가족의 탄생>은 전편을 흐르는 그 따뜻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제도적 불모성을 예리하게 묘파한다. 그것은 권력과 화폐와 도덕과 이데올로기의 울타리 속에 지탱되는 가족도 아니며, 가족애로 일심동체가 되는 가족도 아니다. 그것은, ‘넌 나한테 왜 그러냐?’고, ‘너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네가 변했다’고 지목하는 그 손가락들이 어긋나는 자리로서의 가족을 말한다.
기사등록 : 2008-07-11 오후 07:2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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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김영민, 그가 10년 전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몇 년 전부터갑자기 사라졌다. 그를 그리워해서 책을 사보는 것으로 대신하거나 곧 그를 대체할 새로운 필자를 찾아냈기에 그를 잊고 지냈었다.오래도록 누군가를 끊임없이 같은 농도로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고 싶지만... 얼마나 단념을 쉽게 하고 포기를 잘하는지.... 그렇지만 그때 당시의 열정은 항상 다이너마이트 같아서 시간이 흐른 뒤엔 언제나 주변 사람들 볼 면목이 없다. 배구 현대 스카이워커스팀에 대한 내 사랑이 한 시즌 밖에 못 갈 줄이야. 당사자인 나도 당혹스러울 정도다.배구장 다 쫓아다니던 그 겨울엔 내년 여름엔 당연히 현대 선수들과 함께여름캠프가고, 서포터즈 회장이라도 할 것 같았는데, 이거 뭐 세계선수권이 흐지부지 되면서 내 마음도 흐지부지 되었다. 공지영씨 소설의 대사 "잊으니까 우린 사는 거라고" 했던가. 그래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한결같은 다이너마이트 같은 열정으로 산다면 내 명대로 못 살았을지 모른다. ㅋㅋㅋ
김영민씨가 동무론도 연재하고 이번엔 영화도 연재한다. 영화 평을 보면서 항상 감탄했지만, "가족의 탄생"에 대한 영화평이 최고라고 할까. 그가 아직까지 독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 글에 독신주의자로서 살면서 감내해야 될 것 중에 "박해에 대한 예감"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그 모진 박해를 이겨내고 독신으로 살아가면서 가족에 대한 정의를 내렸는데,김태용 감독이 그 가족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잘 표현해줬기 때문에 이런 멋진 글이 나왔지 않았을까 상상한다.
정확한 수사를 하는 문장을 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철학자로서 김영민 씨는 단어가 한옥집의 나무들처럼 딱 들어맞는 완벽한 문장을 구사한다. 그래서 너무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가 내 시야에서 사라진 몇년 간 무얼했을까. 다시 그를 검색해 봐야겠다. 그러고보니 요즘에 기고를 안하시는 박구용 철학교수의 글도 올려야겠다. 역시 철학자들은 글을 넘 잘 쓴다. 철학자들에 대해선 질투가 안 난다. 대단하다는 생각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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