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증 앓던 스트립걸 인류학 교수로 “고릴라야 고마워”
기사등록 : 2006-02-09 오후 06:25:10
7학년에 술 배우고 8학년에 철학에 빠졌다
16살에 자퇴하고 노숙·술집 전전
동물원 고릴라를 만나면서 영혼이 깨어났다
왜 그렇게 생이 힘들었는지 36살에야 자폐증임을 알게됐다
그는 서른 여섯살이 되어서야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아동기에 그런 진단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서른 여섯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깝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의식한 채 소외되고 단절되고 상처받으며 긴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내가 그 사건을 어떻게 견디었는지,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기까지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s Syndrome)은 자폐증의 일종이다. 대중매체가 유포한 자폐인의 이미지는 판에 박힌 듯 ‘일차원적 인간’이기 십상이다. 표정과 몸짓 같은 비언어적인 제스처를 사용하고 또래와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며, 정서가 단조롭고 언어발달이 지체되거나 미숙하다. 또 대화를 시작하거나 유지하지 못하고 한정된 관심사에 몰두하며 특정 행동이나 의식을 강박적으로 수행하고 손바닥을 찰싹찰싹 치거나 비틀고 물건의 일부에 집착한다. 아마 가장 널리 알려진 이런 자폐증은 캐너 증후군(Kanner’s Syndrome)이다. 그러나 자폐증의 증상은 엄청나게 다양하다. 통상 캐너 증후군이 저기능 자폐증으로 불리는데 비해 아스퍼거 증후군은 고기능 자폐증으로 분류된다.
▲ 고릴라 왕국에서 온 아이
던 프린스-휴즈 지음. 윤상운 옮김.
북폴리오 펴냄. 9500원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는 언어능력에 큰 문제가 없으며 인지능력, 학습적응 행동, 환경에 대한 호기심에서도 임상적으로 의미있는 발달지체 현상을 보이지 않는다. 지능지수는 오히려 영재급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뉴턴과 아인슈타인, 영화감독 팀 버튼이 아스퍼거 증후군 기미를 지녔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감각과 행동 면에서는 저기능 자폐아와 똑같은 특징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고 의사소통 능력이 부족하며 반복행동에 열중하고 관심의 범위가 극도로 좁다. 감각은 지나치게 예민하다.
아스퍼거 증후근 환자의 지독한 실화
저기능 자폐아들과는 달리 고기능 자폐아들은 많은 경우 외견상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를 개선시킬 수 있으며, 바로 그런 속성 때문에 그런 사람은 자폐아가 아니라는 사회 고정관념의 희생자가 되기 쉽다. 방치할 경우 그들은 그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절망속에 남몰래 처절한 심리적 사투를 벌여야 한다.
<고릴라 왕국에서 온 아이>(북폴리오 펴냄)는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로 태어나 오랜 방황 끝에 인류학 협동과정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 미국 웨스턴워싱턴 대학에서 원시문화 및 정체성 연구 교수(인류학)로 활발한 창작 및 사회 활동을 하고 있는 던 프린스-휴즈가 “(자폐아로) 태어나면서부터 어른이 되기까지의 여정과 쓰라린 기억을 기록한” 책이다. 여성의 몸으로 이런 정도의 자폐증을 지닌 채 한국땅에 태어났더라도 이런 ‘인생역전’이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덜컥 나게 만드는 책이다.
태어난 날부터 기억하고 있는 휴즈의 어린 날은 빛과 소음, 냄새, 촉감에 민감한 ‘감각중독’에 빠졌으며, 여덟살에 들어간 유치원에서 그는 첫날부터 줄을 어떻게 서는건지도 몰라 당황하면서 벌써 “내 인생 끝났어. 다 끝난 거야”를 되뇌었다. 자폐는 태생적 저주였다. 조부모와 이모, 삼촌, 엄마 등 대부분의 친인척들이 자폐 스펙트럼장애와 관련이 있는 질환을 갖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천식이 시작됐고 3학년 때 구구단을 외지 못한다고 구박한 구제불능의 담임선생 아래서 수학은 엉망이었으나 언어와 읽기 분야 실력은 뛰어났다. 7학년에 술을 배웠고 친구는 한명도 없었으며,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얼굴을 식별하지 못하는 안면인식장애를 앓았다. 8학년에 철학에 빠져들었고 성적으로 무관심했으나 동성애자(레즈비언)로서의 특성들이 드러났다. 고등학교까지는 마치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열여섯살 때 학교를 떠났다. 몇년간 노숙자로 전국을 떠돌다 마침내 직장을 얻었는데, 스트립쇼 클럽 댄서자리였다. 손님이 25센트 동전을 투입구에 넣으면 막이 올라가고 20초 동안 춤을 추었다. 1시간마다 10분꼴로 쉬면서 하루 8시간씩 춤을 추었다. “뒷날 유리벽 안에서 살고 있는 고릴라와 시간을 보낼 때 나는 우리의 삶이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시되는 동물과 댄서들은 악의에 찬 욕설과 왜곡된 시선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었다.”
▲ 아스퍼거 증후군 자폐아였던 인류학자 던 프린스-휴즈는 오랜 방황 끝에 동물원에서 고릴라 가족들을 만나 그들과 교감하고 하나가 됨으로써 심연에서 헤어나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 북폴리오 제공
여전히 자폐증 그러나 더없이 행복
그 일을 몇년 하는 동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다소 안정을 얻은 휴즈는 자연과 동식물에 대한 애정을 되살렸고 동물원으로 갔다. 거기서 고릴라 가족들을 만나고 그들과 일체가 되면서 영혼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고릴라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 대신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너무도 섬세하고 한결같아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움직일 필요도 없이, 인간의 대화에 수반되는 오만하고 무례한 단어, 부담스러원 접근과 날카로운 시선이 주는 중압감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리벽에 갇힌 고릴라들이 부드럽게 말을 했다. 그들의 몸과 얼굴과 동작은 한편의 서정시였다. 촉촉한 물기와 은은한 향기로, 푸근한 대지와 아득한 과거로 이야기를 자아냈다. 고릴라들은 나와 비슷했다.” 고릴라의 언어들을 배우면서 인간과의 의사소통 가능성도 열렸다.
휴즈가 서른 여섯살에 아스퍼거 신드롬 자폐인이라는 전문가의 공식진단을 받아낸 것은 타라와의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인디언문학에 나타난 성(젠더)역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타라와 휴즈는 레즈비언 커플이다. 타라는 체외수정으로 아들까지 낳았고 가장 역할은 휴즈가 맡았다. 휴즈는 더없이 보람차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의 자폐증이 ‘치유’된 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사람 만나기를 겁내고 공공장소에 가기만 해도 긴장하며, 하나의 사고과정이 방해를 받으면 모든 게 뒤죽박죽이 돼버리고, 소리에 여전히 민감하며 만성적 불면증과 공황발작 증세에 시달리고, 평온을 가장하기 위해 신체의 일부를 끊임없이 격렬하게 움직이며 매번 똑같은 옷을 입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공식진단을 받은 자폐인’이다.
다만 이제 그의 자폐증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조적이고도 아름다운 또 하나의 방식”으로 질적 전환을 했을 뿐이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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