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읽었다/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2006-01-19
슬픔의 깊이만큼 빠져 버렸네
힘차고 도도한 젊은 때 어둡고 그늘진 시와 만남
내가 지니지 못한 심연 속으로 이끌렸다
신처럼 완전해지고 싶어서일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부분에 이끌린다. 결핍을 채우려, 자신과 정반대의 사람을 사랑하고 그 매력에 빠져드는가 보다. 나도 그렇다. 사람을 좋아할 때마다 이런 잣대를 내세운다. 밝고 명랑한 내가 가질 수 없는, 다소 어둡고 침잠해 들어가는 매력…. 나는 이런 느낌의 사람이라면 무작정 좋다. 비단 사람을 얘기할 때만 이런 기준을 들이대는 게 아니었다. 글을 읽어도 인생의 슬픔이 담기지 않은 글은 나의 심금을 울리지 못했다. 나아가 영화와 음악을 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슬픔이 가져오는 가라앉음의 크기만큼을 나는 대상이 지닌 깊이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정용실/ <한국방송> 아나운서
특히 나의 20대, 그 힘차고 도도했던 젊음의 시기에, 어둡고 그늘이 드리워진 시인 기형도를 알게 되었고, 그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과 만났었다. 그가 지닌 정반대의 매력에 빠져서…. 그리고 얼마 안 돼 그의 죽음을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다. 극장 안의 어둠과 외로움, 절망 그리고 그가 느낀 버거운 삶의 무게…. 그의 가슴을 억누른 무언가가 내게도 전해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의 시집을 펼쳐들었다. 그리고 시 하나하나에 묻어 있는 죽음의 그림자, 아니 죽음을 생각할 만한 단서들을 골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가 나는 우연히 느꼈다. 그의 시 구석구석에 녹아 있는 가난과 그리움, 애절함… 이런 것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이가 들어 아물어 사라지지 않고,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표피 아래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 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 전문
기형도는 참 여린 사람인 것 같다. 보통 어린 나이엔 어머니가 겪을 고통보다는 내 자신의 외로움과 불편이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인데. 그의 시에는 그의 기다림이 한 칸, 어머니의 지치고 힘든 삶이 한 칸, 이렇게 하나씩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가 더 아프게 다가오는가 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이 자신의 처지와 교차되어 더욱 증폭된다. 그는 상대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외면할 만큼 모질지 못한 사람인 것 같다. 그러기에 그는 시인이다. 이렇게 하나하나를 다 느끼고 아파하니, 세상을 굳세게 살아가기란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삶이 빨리 끝나버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오자 그의 죽음을 이제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참 아쉽다. 그의 부재가.
어제는 진눈깨비가 결국은 비가 되어 내렸다. 밤새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 그의 시 한 편이 더 떠오른다. <진눈깨비>. 시에서 그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 날은 오늘보다 더 추운 날이었던 것 같다. 그는 도시를 걸으며 참 외로워했다. 도시에서 한 개인이란 늘 이렇게 소외되고 무능력한 존재다. 이것이 바로 도시 삶의 법칙이다. 모여 있으되 따로 있는 것. 그리고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초라할 정도로 미미한 것. 그는 이런 삶을 원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돌아보게 되는 사람들의 아픔이 다 느껴지고 보였다. 그러나 이걸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것이 사람간에 진정한 교감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의 시를 읽다 보니,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우리가 바라는 삶은 과연 무엇인가. 그가, 그의 시가 우리들의 삶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역시 그는 내가 가지지 못한 깊이를 가졌다. 그래서 그가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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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기형도 전집과 시집을 읽으며 '엄마걱정'에 많이 공감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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