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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선이골 김용희씨와 만화가 신영식씨

by eunic 2006. 1. 17.

며칠 전,

병에 언제 걸릴지 모르니 보험 하나들라는말에

'그냥 살다가 죽을거에요'라고대꾸했습니다.

내젊음은 영원하다고 굳세게 믿는사람은 아닌데.

내생활습관이 바른 것도 아닌데.

오히려아파서 하루종일 누워있노라면 아프다는 게, 병에 걸리는 게

얼마나 큰 공포인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인 제가.

한 6개월 전인가 몸이 좋지 않아 태반 성분이 든 한약을 먹었습니다.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평소의 건강한 나였더라면 이상하게 생각했을 일인데,

몸이 아프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약 테스트를 위해 무수히 죽어간 동물들.

임상시험을 받은 환자들에 대한 죄책감은

고통에 잠시 잊혀졌었나 봅니다.

며칠 사이에 문명의 이기를 철저히 거부한 댓가로

한분은 다른 세상에,다른 사람은생사의 기로에 있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그걸 읽고 있으니 그 분들은

자신이 선택한 삶(신념)을 목숨을 바꾼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분들의 선택이 잘못됐다, 잘했다를 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많이 아픈데,선이골 김용희씨처럼, 짱뚱이 만화가 신영식씨처럼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과연 어떤 선택이 행복한 죽음을 맞는 법일까 하고요.


말기 식도암 사투중인 ‘짱뚱이 시리즈’ 환경만화가 신영식씨
“환경운동도 사람도 일회용 되니 아쉬워”


▲ 지난해 여름 신영식씨가 강화도의 자택 옆 화단에 부인과 함께 앉아 있다.

당시 암은 이미 잘라낸 식도 주변으로 전이됐으나 말라리아에는 걸리기 전이어서

얼굴이 비교적 좋아 보인다.

(인터뷰를 하면서 찍은 사진은 신씨의 요청에 따라 공개하지 않는다.) 열림원 제공

“‘짱뚱이 시리즈’ 7권이 왜 빨리 안나오느냐고 묻는 메일이 많이 온다네요. 어서 그려야 될텐데….”
‘환경만화의 교과서’로 불리는 <하나뿐인 지구>와 100만권 이상 팔린 ‘짱뚱이 시리즈’ 등으로 유명한 환경 만화가이자 운동가인 신영식(56)씨가 17일 바싹 마른 입술을 힘들게 움직여 말했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난민을 연상시키는 움푹 들어간 볼과 눈, 튀어나온 광대뼈에 피부 가죽만 씌워져 있는 듯한 그의 얼굴에서 그의 육체가 겪어온 고통을 읽을 수 있었다. 강화도 선원면의 한 아파트에 누워 있는 그 참혹한 얼굴에서 ‘짱뚱이 시리즈’ 제6권 <짱뚱이의 아빠> 속표지에 그려져 있는 인물을 떠올리기는 불가능했다. 그는 거기서 아내와 함께 자신을 목숨을 위협하는 암과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2004년 6월 어느날 서울 안국동에서 환경단체 관계자들과 핵폐기장 반대 기자회견을 한 뒤 점심을 먹던 그는 목에 무언가 걸린 듯한 통증을 느꼈다. 다음날 병원을 찾은 그에게는 식도암 말기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늦었으니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달초 그는 가장 빨리 수술일정을 잡아준 공릉 원자력병원에서 식도를 잘라냈다.

방사선 대신 자연재료로 1년6개월 버텨 ‘기적’
매일 이별 준비하면서도 시리즈 7편 낼 의욕

수술 뒤 병원에서는 암의 전이를 막아야 한다며 방사선 치료를 권했다. 그는 거부하고 자신이 지은 강화의 흙집으로 돌아왔다. “오래 반핵운동을 해 온 사람으로서 원자력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것도 못마땅해 했거든요. 자신이 그토록 혐오한 방사능의 도움을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데다가, 자연 먹거리와 천연 항암성분 등으로 몸의 면역력만 높여주면 암도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고요.” ‘짱뚱이 시리즈’에서 글을 맡은 동화작가이자 아내인 오진희(42)씨가 말할 기력이 떨어진 남편을 대신해 말했다.

수술 9개월 뒤 의사들은 그에게 암이 주변 장기로 전이됐다고 알려줬다. 하지만 그는 계속 자연치료를 고수하면서 국도확장으로 파헤져질 봉천산 살리기를 주도하는 등 환경운동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멀쩡한 사람처럼 몸을 굴리는데도 잘 버텨주던 몸이 결정적으로 무너진 계기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라리아 감염이었다.

보건소에서 내준 독한 치료약은 말라리아를 낳게 한 대신 쇠약해진 그의 내장 곳곳에 치명적 부작용을 남겼다. 복용 1주일 만에 간은 거의 기능을 상실했고, 위는 격렬한 경련을 일으킨 뒤 미음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결과 그는 말라리아에 걸렸던 지난해 8월말 이후 곡기는 아무 것도 넘기지 못한 채 물과 쇄골정맥에 꽂아 넣은 주사바늘로 공급되는 포도당과 영양제,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힘겹겨 버티고 있다.

흙집에 외풍이 심해 지난달 초 지인이 빌려준 아파트로 옮겨 온 뒤에는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의식을 되찾은 신씨는 아내에게 유언을 하고 영정사진을 마련했다. 부음을 낼 사람들의 명단을 뽑고, 작별인사를 할 요량으로 가까운 이들을 집에 초대하기도 했다. 차근차근 세상과 이별할 준비를 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삶에 대한 희망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씨는 “6개월을 넘기기 어렵다던 사람이 1년반 이상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알고는 의사들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겠다는 말을 한다”며 “남편이 생일인 정원대보름 전날(2월11일)까지 일어설 수 있으면 가까운 분들을 초대해 잔치를 열 생각”이라고 말했다.

언제든 세상과 이별할 준비를 하고 누워 있는 신씨에게 남은 아쉬움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지금까지 삶에 후회는 없습니다. 다만 그동안 환경운동을 하면서 일회용품을 참 싫어했는데, 어느새 환경운동도 일회용, 그 속의 사람들의 관계도 일회용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신씨는 생각을 모으려는 듯 잠시 감았던 눈을 뜨며 힘겹게 말했다.

신씨는 “요즘 걸어가는 꿈을 자주 꾸고 있는데, 그런 꿈을 꿀 때마다 몸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 같다”며 “생각 같아서는 곧 일어나 독자들이 기다리는 ‘짱뚱이 시리즈’ 7권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며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강화도/글·사진 김정수 기자 jsk21@hani.co.kr

자연으로 돌아간 ‘선이골 다섯아이의 엄마’ 김용희씨
“내 무덤엔 나무 한그루만 심어주길”




▲ 고 김용희(왼쪽)씨가 생전에 남편 김명식씨와 함께 팔짱을 끼고 화천 5일장에서 생필품들을 사기 위해 길을 나서고 있다.

“이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는가. 참으로 빌고 빌 뿐이야. 그 사람을, 용희를 제발 돌려줬으면 좋겠네.”
환갑을 넘긴 한 사내의 시선은 빈소 앞에 놓인 영정사진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른 어깨는 결국 무너지듯 들썩거렸다. 애써 참았던 눈물은 눈가의 주름을 타더니 이내 굵은 마디가 되어 흰수염을 덮었다. 자신과 함께 이룬 다섯 아이들의 엄마이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김명식(61)씨는 그렇게 흐느껴 드러냈다. 고 김용희(45)는 그에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던 인생의 반려자이자 동지였다. 그의 흐느낌은 오래도록 지속됐다.

7년 전 도시 떠나 화천 외딴집에 온가족 둥지
‘가난의 풍요’ 글로 다큐멘터리로 전해 큰감동


문명을 거부하고 자연그대로의 삶을 살고자 했던 한 중년의 부부와 다섯 아이의 삶을 다뤄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2003년 한국방송 다큐멘터리 <선이골 다섯아이를 품다>의 주인공 김용희(45·여)씨가 지난 9일 오후 영원한 안식처인 자연속으로 돌아갔다. 그의 가족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죽음이었다.
버거웠던 도시의 삶을 벗어나 온 가족과 함께 강원도 화천의 깊은 산골인 ‘선이골’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 지 7년.



▲ 장례식을 마친 김명식(62·오른쪽부터)씨와 장남 선목이(16) 3남 일목이(13) 막내 원목이(10) 4남 화목이(12) 차남 주목(14)이가 고 김용희씨의 봉분 앞에서 함께 손을 잡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

전기도,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산간 외딴집에서 숲이 전해주는 꾸밈없고 따듯한 기운을 전해주려 애쓰던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필요에 넘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단 몇 권의 책과 공책, 연필 한 자루, 두 벌 옷과 한 짝의 신발, 이불 한 채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곳에서 조차 ‘가난의 풍요로움’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실패라 하겠지? 자연과 유리된 대도시에선 가난이 재앙이고 큰 불편이겠지만 이곳에선 가난은 자유이며 축복이지.”

라며 적극적인 자연귀의적 삶을 갈구했다.

다섯 자녀들은 ‘하늘평화학교’라 부르는 그 외딴집에서 부모에게서 글을 배우며, 선이골 품 안에서 대자연의 섭리를 익혔다. 같은 제주도 출신으로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온몸을 던져 싸우다 두 번이나 옥고를 치렀던 역사연구가 남편과 더불어 그녀는 자연과 만나는 대안적 삶을 따르며 ‘똥이 오물이 아닌 거름’이 되기를 갈망했다. 선이골에서의 삶을 오랜 글쓰기로 남겨놓았던 그녀는 지난 2004년 여름 부부와 다섯 아이의 삶을 진솔하게 담은 책 <선이골 외딴집 일곱 식구 이야기>(도서출판 샨티)를 펴내 독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선이골에 와서 참 만남의 의미를,
빛과 어둠의 아름다움을, 외식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과 나를 다시 만나고 있다.”


80년대 우울했던 시대를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 직접 약국을 운영하면서도 사람들의 체질과 질병에 따라 양약 대신 민간요법을 권해왔던 그녀는 인위적인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고 선택한 선이골에서의 삶에서 깊은 만족감을 얻었다. 그는 그 감사함을 책을 통해서 이와 같은 말들로 표현했었다.
조금은 더 이어졌어야 할 그녀의 죽음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그가 숨진 다음날인 지난 10일 밤.


8년만에 처음으로 선이골에 전깃불이 밝혀졌다. 산아래 이웃들이 여러곳에서 찾아오는 조문객들을 위해 농삿일에 쓰던 발전기를 들여와 불을 밝혀준 것이다. 햇빛이 머금어준 달과 별의 천연의 기운만으로도 그 밝음이 도시의 차가운 빛에 모자라지 않던 선이골의 밤은 홀연히 하늘로 떠난 안주인과의 작별을 위해 요란스런 문명의 기기에게 자리를 내줬다. 다섯 아이들 중 장남 선목이(17)는 의연한 표정으로 잠 한숨 자지 않으며 손님들의 뒷바라지에 나섰지만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을 때마다 소리없이 눈물을 훔쳤다. 아직 엄마의 부재가 실감이 나지 않는 네 동생들은 온 집안을 가득 채운 손님들 틈에서 시선 둘 데를 찾지 못하는 듯했다.


골짜기 나무숲을 휘감는 솔바람도, 이름모를 돌틈사이 잡풀도, 얼음 밑 작은 개울물도 소리를 거두어 떠난 이의 죽음을 슬퍼했다.
평소 건강한 몸을 이루라고 권했던 그녀이기에 급작스런 죽음은 뜻밖이다. 그러나 오히려 자연의 일부가 되는 영원한 삶을 희망했기에 가장 그다운 이승과의 이별일지도 모른다. 평소 그는 가족들과 삶과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혹시 내게 일이 생기면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조용히 보내주길 바란다”면서 “무덤엔 나무 한 그루 정도 심어달라”고 예언과고 같은 희망을 말했다고 한다.
그의 희망대로 남은 가족들은 고즈넉하고 양지바른 언덕에 그의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했다.
화천/사진.글 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