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입양을 결사반대한다”
‘고아의 나라를 위한 위로’라는 제목의 박사논문 쓴 스웨덴 입양인 이삼돌씨
노예제도·종군위안부와 ‘충격적으로 유사한’ 입양을 중단하는 것도 과거청산
▣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 통역 이우선/ 해외입양인연대 인턴
“과거 청산.”
영어로 인터뷰를 하던 그가 또렷한 한국말을 썼다.
스웨덴 입양인 이삼돌(34·토비아스 후비네트·Tobias Hubinnet)씨는 “해외 입양 중단은 과거 청산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에서 한국학을 전공하고 있다.
오는 12월 ‘고아의 나라를 위한 위로’(Comforting an Orphaned nation)라는 제목의 박사논문 심사를 앞두고 있다. 한국출신 입양인으로 한국과 입양 문제를 연구하는 드문 학자다.
그는 지난 8월18~19일 (사)해외입양인연대(G.O.A.’L)가 주최한 제6차 연례 컨퍼런스에서 강연을 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입양에 대한 견해 탓에 스웨덴에서 유명인이 됐다.
스웨덴에서 ‘역인종주의자’로 비판당하다
△ 입양인이 말하는 입양인의 역사, 이삼돌씨는 이제 슬픈 역사는 끝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견해는 강연문인 ‘해외 입양: 식민주의와 근대주의 사이에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는 강연문에서 해외 입양과 노예제도 사이에 “충격적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서구의 수요에 의해 수출되고 자신의 언어를 박탈당하지만, 경제적 조건이 향상된다는 점 때문에 두 제도가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일본군 종군위안부와의 유사성은 “지배적 권력에 인간을 공물로 바치는 한국의 전통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두 집단 모두 “수치와 불명예로 인해 보이지 않고 말할 수도 없는… 소외 하층민”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그리하여 그는 해외 입양에 결사반대한다.
그의 급진적인 견해는 ‘관용’에 둘째가면 서러울 스웨덴인의 심기조차 불편하게 했나 보다.
해외 입양인을 “이국적 애완동물” “살아 있는 트로피”에 비유하는 그의 견해를 스웨덴인뿐 아니라 입양인들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그래도 그는 신념을 ‘고수’했다. 그 결과는 ‘고립’이었다.
스웨덴 한국입양협회의 소식지 편집장직과 스웨덴 한국협회의 회보 편집자직을 사퇴해야 했다. 그는 “유럽 한국학 총회에도 초대받지 못했고, 학술지 논문 게재도 저지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한국학자들은 한국인 2세들이 많지만, 유럽의 한국학자들은 여전히 대부분 백인들”이라며 “유럽의 한국학이 미국에 견줘 오히려 보수적”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지도교수와 동료 연구자들도 그를 멀리하고 있다. 12월 논문 통과를 위해 그는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스웨덴인들은 사회복지 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며 “입양인 출신의 학자가 그들의 자부심에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는 서구(백인)인을 역차별하는 ‘역인종주의자’로 비판당하기도 했다. 그를 비판하는 글이 (그의 표현대로라면) “스웨덴의 조선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도 비판이 전파를 탔다. ‘역인종주의자’에 대한 인종주의자들의 공격도 있었다. 그의 양어머니의 집이 네오 나치들에게 공격받은 것이다.
왜 흑인이 아닌 아시아인을 입양했을까
자, 이쯤 되면 그의 성장 과정이 궁금하다. 양부모의 학대 같은 ‘안 좋은 기억’이 그를 ‘급진적인 견해’로 이끌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하기 십상이다.
그는 웃으며 “양부모와 관계가 좋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의 배경이 급진적”이라고 덧붙였다. 서구의 양부모는 대개 중산층이지만, 그를 입양한 부모는 노동계급이었다.
아버지는 용접일을 하는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유치원 교사였다. 그가 자란 곳도 스웨덴 남부의 노동자 밀집 도시 무탈라(Motala)였다.
그의 양부모는 사회민주당의 당원이었고, 노동조합의 활동가였다. 그는 청년기에 ‘자연스레’ 아나키스트가 됐다.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운동도 열심히 했다.
한편으로는 모범생이었다. 작은 체구와 다른 피부색을 극복하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했다. 웁살라대학에서 아일랜드학을 전공했다. 참, 그는 1살 때인 1972년 스웨덴에 입양됐다. 입양 전, 전라선 열차 안에서 한장의 종이와 함께 발견됐다. ‘이삼돌’이라는 이름만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고향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친부모를 찾기도 어렵다.
한국에는 무관심했다. 1996년 세계한민족체전 참가를 위해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일단 한국의 발전상에 놀랐다. 이토록 발전하고 민주화된 나라가 아직도 해외 입양을 한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그에 따르면 현재도 해마다 2400명의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고 있다).
“왜 입양이 계속될까.” 그의 화두가 됐다. 대학원에서 전공을 한국학으로 바꾸었다.
후기식민주의를 바탕으로 한국학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해외 입양이 서구의 식민주의와 한국의 근대주의가 결합된 문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에 따르면, 서구의 식민주의는 입양을 통해 가부장제가 버려진 아이들을 구한다는 ‘선한 가면’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그의 강연문에 대답이 있다.
“입양기관에는 사업이었고, 정부에는 사회복지 비용 지출을 피하는 도피처였으며, 사회에는 엄격한 가부장적·인종주의적·이성애적 규범을 지킬 수 있는 잔인한 자기규율이었다.” 참, 1997년에는 스웨덴 한국입양인협회에서 만난 입양인 김선경씨와 결혼도 했다.
△ 이삼돌씨는 박사학위를 받은 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어하지만 그의 '관점' 탓에 전망이 어둡다.
그는 단호한 입장과 달리 수줍음도 많이 탔다. 때때로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흥미로운 이야기도 풀어놓았다. 그는 비서구 사회에서 서구 사회로 입양이 본격화된 시기가 한국전쟁 직후라고 했다.
“자비로운 백인 어머니의 이미지를 위해서 비서구의 어린이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은 ‘대표’ 입양국이 됐다. 그리고 “묘하게도 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성, 일본군 종군위안부, 입양인 각각의 총합이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날카로운 지적도 했다. 그는 “세계사적으로, 인류사적으로 혈연관계가 없는 가정으로 입양되는 서구적 입양은 아주 예외적”이라며 “노예제도 등에서 서구적 개념은 비판을 받았지만, 입양 문제에서는 서구적 기준이 아직도 보편적이고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그는 흥미로운 질문도 던졌다. “왜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원주민 어린이가 아니라 아시아(특히 동아시아)의 어린이들이 주된 입양 대상이 되는가?”
그는 “정리된 대답은 아니지만”이라고 단서를 달고 “서구 제국주의가 흑인과 남미 원주민을 혹독하게 착취했기 때문에 그 지역의 아이를 입양하는 것에는 자책감과 꺼림칙함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동북아시아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식민지 경영을 하지 않아서 직접적인 감정이 덜하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침묵을 깨고, 위로하고, 치료해야
하지만 서구는 입양을 통해 아시아(인)에 대해 “보호자”의 이미지를 가지게 됐다.
그는 입양 문제에 대한 가장 낮은 목소리로 생모의 목소리를 꼽았다. 그는 “15만명의 해외 입양인이 있었다면 15만명의 생모가 있었을 것”이라며 “생모들의 목소리는 성별화된 한국 민족주의라는 전통과 인종화된 서구 자본주의라는 근대성 사이에서 여전히 들리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의 견해로 생모는 최후의 식민지인 셈이다.
그의 강연문은 이렇게 끝난다. “한국이 지금 당장 해외 입양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현대의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자신의 아이들을 수출해온 국가라는 사실을 여전히 극복하여야만 한다.” 그는 “침묵을 깨고, 위로를 하고, 치료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박사논문 제목은 ‘고아의 나라를 위한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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