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대들

원웨이 티켓의 아이들

by eunic 2006. 1. 13.

지난 주 금요일 밤에 MBC <암니옴니>를 오랜만에 보게 됐는데, 입양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kbs의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 입양아들이미안해하는 엄마에게

"전 괜찮아요. 용서해요" 라고 말하는게 얼마나 많은 생각 끝에 하는 말인지 알게 됐다.

입양되면 외국말도 저절로 배우게 되고, 좋은 교육 받고, 잘살거라고 생각했는데,

충격이었다. 보면서 많이 슬펐고, 입양제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본이 제공되지 않는 관계로 홈페이지에 들어가서동영상을 여러번 보면서

내용을 받아적었다.

입양아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내 가슴을 울렸다.

오늘 밤에 2탄을 하는데, 보러가야겠다.

원웨이티켓의 아이들.hwp

원웨이티켓의 아이들


MBC 암니옴니 2006-01-06


윤용철 기자 : 오늘 뉴스플러스 새해 첫 방송에서는 입양문제를 집중 조명해 보겠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5천불, 경제규모 세계 11위,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제선진국 모임인 OECD 가입국 가운데 해외로 아이들을 입양보내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합니다.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 우리나라의 해외입양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이들 어릴 적 사진 차례로 나오고)

어려웠던 시절

빈곤과 궁핍에서 비롯된 해외입양


나레이션 : 먹일 게 없어서, 키울 수 없어서 잘 사는 나라의 부모들 만나 좋은 환경에서 자라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작된 해외입양. 그러나 어떠한 선택의 권리도 없이 원웨이티켓만을 안고 이국만리 타향길에 오른 우리의 아이들은 과연 우리의 기대대로 행복하게 자라주었을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머나먼 이국으로 떠나야 했던 아이들


입양아 인터뷰 내용 짤막하게, 자막과 함께

'내가 나쁜 아이라서 양아버지가 날 때렸고'

'매일 매일 내가 나쁜 아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어요.'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두려웠어요.'

'양어머니가 무슨 일을 시킬까. 때리거나 소리지르지 않을까...'


나레이션: 그저 좋은 부모 만나서 그 나라 사람으로서 잘 살아주길 빌어주는 것으로 우리의 의무는 끝나는 것일까. 그들이 직면하는 문제에 아무런 대책도 도움도 돼줄 수 없는 고국을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인터뷰

'많은 입양아들이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심한 원망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


나레이션 : 가난 때문에 시작된 해외입양, 그러나 더이상 배고픈 나라, 원조를 받는 나라도 아닌데 왜 우리는 아직도 한해 2천명이 넘는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내고 있는 것일까? OECD국가중 유일하게 아이들을 해외 입양시키는 나라, 대한민국.


아직까지 한해 2000명 이상

해외 입양되고 있는 현실

OECD 국가중 유일한 해외 입양국!

올림픽과 월드컵의 영광 뒷길에 아동수출국 세계 4위(자막 아동 수출국 세계 4위)라는 오명이 숨겨져 있는 나라.

해외입양 50년 이대로 계속되어야 하는 것인지 암니옴니에서 뉴스 애프터서비스 해드립니다.


타이틀 나오고 : 원웨이 티켓의 아이들


전영우 기자: 1953년 4명의 전쟁고아들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의 해외입양은 시작됐습니다. 이후 1970년대에는 해마다 7천명에 이르는 아이들이 외국으로 떠나기도 했습니다. 90년대 들어 일년에 2천명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 고아수출국가 중에 하납니다. 최근 4년만 보더라도 해마다 평균 2천300명의 아이들이 해외입양길에 올랐습니다. 하루 평균 7명의 우리 아이들이 단 한번밖에 쓸 수 없는 단수여권과 편도비행기표를 들고 이방인의 나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탁모가 아이를 안고 문여는 화면)

성탄절을 닷새 앞둔 지난해 12월 20일 위탁모 오세순씨의 집. 오씨가 8개월째 돌보고 있는 지은이는 눈웃음을 잘 짓습니다.


오세순/ 위탁모

너무 예쁘거든요. 엄마 소리도 하고, 식구들 나갔다 들어오면 반겨주기도 하고...


(지은이 노는 모습 원샷)

지은이를 낳은 엄마는 미혼모. 그 엄마는 낳은 지 일주일 만에 지은이를 포기했습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지은이는 프랑스로 떠납니다. 그곳에는 지은이를 키워줄 양부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날 밤 오씨는 지은이가 가져갈 가방에 옷가지 몇벌과 우리나라 전통 문문양의 기념품을 함께 넣었습니다.


오세순/ 위탁모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죠. 아이한테 엄마가 정말 중요하거든요. 인성이 가장 중요하니까. 엄마한테서 자라야 되는데...


지은이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입니다. 태어난지 일주일만에 좋은 위탁모를 만나 따스한 사랑을 받았고, 자기를 키워줄 양부모도 일찍 정해졌습니다. 위탁모를 찾지 못해 입양기관에 영아 임시보호소에서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오세순/위탁모

항상 아쉽죠. 더 잘해주고 싶고 더 많이 안아주고 싶고, 많이 업어주고 싶고 그런데... 갈 때되면 다 못한 것 같아요.



(아이와 헤어지는 장면)

다음날 오세순씨는 지은이를 해외입양 전문기관에 데려다 줬습니다. 비록 제자식은 아니지만 지은이와 지난 여덟달동안 함께했던 오씨는 눈물을 참지 못했습니다. 지은이가 도착한 공항 유아실은 이제 돌도 지나지 않았을 어린이들의 울음소리로 시끄럽습니다.

2005년 12월 21일 인천공항 유아실

모두 프랑스 양부모에게 가는 아기들입니다. 잠시 후면 프랑스로 떠나는 유학생이나 아르바이트 대학생들이 이 아기들을 프랑스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12시간 뒤에 아이들은 파리공항서 기다리고 있을 양부모들에게 건네집니다. 자기가 태어난 한국에서 선택받지 못한 채 먼 이방인의 품으로 떠나는 아이들. 그들에게는 한번 쓰면 자동으로 폐기되는 단수여권과 편도 여행기표가 주어집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올 수 있을지 돌아온다면 그때가 언제일지 기약은 없습니다.


지금 떠나는 저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선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떠났던 입양인들의 과거와 현재는 어떨까. 암니옴니 취재진은 물어물어 찾았습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서양사람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불리미아. 즉 폭식증을 극복한 사람으로 최근 네덜란드 언론에 대서특필된 조이 윤. 한국 이름으로 윤주희씨. 주희씨는 세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외가에 맡겨졌습니다.


조이 윤/네덜란드 입양인

내가 3살부터 6살까지 할머니 집에 살았어요. 엄마가 (이혼한 뒤) 다른 남자를 만났어요. 그 남자가 엄마랑 결혼하고 싶은데 근데 그가 나를 키우길 원하지 않았어요. 그가 말하길 '나는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은데 딸은 너무 싫다고 키울 수 없다고...


그래서 해외입양이 결정됐습니다.


조이 윤/네덜란드 입양인

제가 부모님, 가족에게 사정했어요. 제발 제발 나를 보내지 말라고... 왜냐면 내가 생각했어요. 내가 안 예뻐서... 나뻐서.. 나를 네덜란드로 보냈다고 생각했어요.


여섯 살 어린 소녀에게 네덜란드는 너무 낯선 곳이었습니다.


조이 윤/네덜란드 입양인

(네덜란드 도착하니까) 갑자기 금발머리 사람들이 많고 갑자기 모르는 사람들이 오더니.. 내 네덜란드 부모님... 나를 잡고 안아주고 하니까 너무 이상했어요.

그 사람이 누군지...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조이 윤/네덜란드 입양인

매일 매일 생각했어요. 엄마와 할머니가 네덜란드로 와서 나를 다시 한국으로 데려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매일 매일 비행기가 올 때마다 “엄마! 엄마! 나 여기 있어, 여기 있어.”

근데 엄마는 안 왔어요.


네덜란드에 정을 붙이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조이 윤/네덜란드 입양인

내가 네덜란드 부모님을 사랑하기 시작했어요. 한국 가족이 없어서 네덜란드 부모님을 사랑하기 시작했어요. 한국 엄마가 내가 안 예뻐서 내가 너무 나쁜 아이라서 보냈다고 생각했어요. 네덜란드에서도 내가 예쁘지 않으면... 나쁘면... 네덜란드 부모님도 나를 또 (다른 데로) 보낼 거예요. 매일 매일 너무 두려웠어요.


또다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에 예뻐보이기 위해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거식증이 시작된 것입니다. 12살 때였습니다.


조이 윤/네덜란드 입양인

언니가 나보다 더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언니보다 더 이쁘면 아마도 날 더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이어트를 시작했어요. 계속 안 먹어서 점점 마르게 됐어요. 2년동안 거식증에 걸려 있었어요. 계속 안 먹으면 내 (가슴) 아픈 느낌을 지울 수 있었어요. 로봇처럼 아무런 생각도 없고 아무런 느낌도 없어요. 그래서 내가 계속 (밥을) 안 먹었어요.


열일곱살이 되었을 때 의사의 처방으로 다시 먹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거식증이 폭식증으로 바뀌었습니다. 역시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이 윤/네덜란드 입양인

먹은 뒤에는 화장실에 가서 토했어요. 하루종일 계속 먹고 토하면 그 방법도 (가슴아픈) 느낌도 없어지고 생각도 없어졌어요.


친부모에 대한 복수심도 생겼습니다.


조이 윤/네덜란드 입양인

내가 먹고 토하면서 힘들어지면 힘들게 살면 고통받으면 (엄마한테) 복수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야, 나봐 너, 나 네덜란드로 보내서 지금 이렇게 됐어.”

내가 엄마한테 슬프게, 아프게 보이면 (엄마에게) 나의 고통을 보여주면 깨닫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실수했다는 걸, 정말 큰 실수였다는 걸... 먹고 토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한테 말하는 방법이었어요. 엄마 뿐 아니라 세계에 말하고 싶어요. “내가 아파요. 내가 외로와요.”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그건 도와달라는 내 외침이었어요. 왜... 왜...


공부도 사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조이 윤/네덜란드 입양인

내가 어떤 남자랑 사랑하고 결혼하면 그 남자도 날 버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남자를 사랑하는 게 너무 두려웠어요. 그게 내가 거식증에 걸린 이유예요.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신은 존재가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조이 윤/네덜란드 입양인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쓰레기.. 내가 사람이 아니고, 쓰레기... (쓰레기라고 생각했어요?) 예. 쓰레기는 행복하게 살아갈 이유가 없어요.


자살까지 생각했습니다.


조이 윤/네덜란드 입양인

내가 부모님 때문에 자살하지 못했어요. 내가 자살하면 네덜란드 부모님께서 죄책감을 느낄까봐. 아, 우리 때문에... 우리 실수 때문에... 주희가 자살했다고 생각할까봐. 내가 아플 때도 아프다는 걸 다 숨겨야 돼요. 다른 사람한테 매일 매일 웃어요.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 말해요. ‘주희는 정말 행복해보여, 매일 웃고 아주 밝고’ 그런데 마음은 매우 슬퍼요. 그래서 지금도 슬픈 얘기를 해도 웃어요.


윤용철 기자 : 비행기만 보면 엄마생각이 났다. 슬픔을 감추기 위해 웃는다. 정말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주희씨의 상처가 짐작이 갑니다.


전영우 기자 : 그래도 윤주희씨는 자기의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가고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자신의 아픈 경험을 책으로 출간을 해서 네덜란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입양인들이 겪는 어려움은 미국보다는 유럽쪽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는데요. 이민도 많고 나름대로 한인사회가 자리잡고 있는 미국에 비해서 유럽에는 동양인 자체가 굉장히 숫자가 적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정체성 혼란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이런 정체성의 문제는 단순히 심리적인 차원을 넘어 실질적인 생존의 문제로까지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스웨덴 스톡홀름

견디기 힘든 찬바람이 몰아닥친 지난달 스웨덴. 스톡홀름 외곽에 산다는 한 입양인을 찾아나섰습니다. 수소문 끝에 찾아간 아파트.

오전 11시가 넘은 시각인데도 그는 자고 있었습니다. 어두컴컴한 방안에는 변변한 조명도 없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이예 베스터베리. 올해 우리 나이로 마흔살이 되는 한국 출신 입양인 이한기씨입니다.

에이예 베스터베리/이한기

67년 대구 출생. 70년 스웨덴 입양


그는 벌써 몇 년째 일주일에 두끼만 먹고 있습니다. 나머지 닷새는 담배와 커피로만 버팁니다.


에이예 베스터베리/스웨덴 입양인

내가 규칙적으로 활동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속 안 먹으면 공복감을 못 느껴요.


13년 동안이나 실업자로 지내고 있는 한기씨. 국가에서 주는 실업수당 30여만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한기씨가 하는 일이란 컴퓨터게임이나 이메일로 아는 사람과 연락하는 게 전부입니다.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다 보니 우울증까지 생겼습니다. 그는 지난 1970년 네 살의 어린 나이에 스웨덴으로 입양됐숩니다.


에이예 베스터베리/스웨덴 입양인

학교 다닐 때 기억나는 것은 학창시절 내내 왕따를 당했다는 거예요. 내가 자란 도시에서 처음 입양된 한국아이였죠. 나는 외로운 아시아인이었죠.


외모 때문에 그는 또래들의 따놀림을 받았고, 따돌림은 집단구타로 이어졌습니다. 맞아서 아프다고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집단폭행이 계속 됐습니다.


에이예 베스터베리/스웨덴 입양인

내가 맞고도 울지 않는 걸 보면 계속 때렸어요. 눈 앞에서 우는 걸 보기 위해서... 한 사람한테 당한 게 아니에요. 따돌림을 당할 때는 일대일로 하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한 사람을 때리는 거죠.


왕따를 막아보려는 양부모의 노력도 소용 없었습니다. 요리 전문학교로 진학했지만 곧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에이예 베스터베리/스웨덴 입양인

계속 따돌림만 당하는 학교 생활에 지쳤기 때문에 더이상 다닐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만뒀어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던 그는 단순노무직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없습니다.


에이예 베스터베리/스웨덴 입양인

쓰레기를 분리하는 환경미화원으로 일했어요. 청소도 하고 쓰레기 관리도 하고... 스톡홀름 지하철도 청소했어요. 2년동안 호텔에서 설거지도 했죠.


목수일을 배우기 위해 목수 보조로 일했지만 손바닥과 발바닥이 딱딱해지는 피부병이 생기는 바람에 이마저도 그만둬야 했습니다.


에이예 베스터베리/스웨덴 입양인

악성 피부병을 앓고 있어요. 그래서 손으로 하는 일을 할 수 없어요. 피부병의 일종인 소리아시스라는 것인데 손바닥과 발바닥에 나타납니다.


의사들은 이 병이 정신적 상태가 안 좋아지면 더욱 악화된다고 진단했습니다. 인생이 썩어들어가는 것 같다는 그에게는 탈출구가 없어 보였습니다.





귀도 스튜벨/ 오경문

72년 부산 출생 추정. 75년 네덜란드 입양


귀도 스튜벨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그는 공항에서 화물 하역작업을 하는 노동자입니다. 한국 이름 오경훈. 지난 75년 5월 5일 어린이날 부산에서 미아가 된 뒤 석달 만에 네덜란드로 입양되었습니다. 72년 출생, 하지만 그것도 추정일 뿐 자신이 몇 살인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좁은 아파트. 살림살이는 아무렇게나 널려 있습니다.


귀도 스튜벨/네덜란드 입양인

양아버지는 기자였습니다.


지식인 양아버지에 분위기 좋은 대가족 출신인 것 같지만 뭔가 단단히 꼬여있었습니다. 조금 예민한 질문에는 아예 입을 닫습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귀도 스튜벨/네덜란드 입양인

그것에 대해 설명하기 싫어요.

옛날 일을 말하는게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인가?

네.


문제는 사춘기에 시작됐습니다.

귀도 스튜벨/네덜란드 입양인

항상 이상하고 기분 나쁜 느낌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나중에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됐죠. 하지만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게 싫었습니다.


한국과 콜럼비아에서 아이들을 네 명이나 입양했지만 정작 자식들에게는 무관심했던 양부모도 귀도에겐 큰 고통이었습니다.


다른 세명의 입양 형제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나?

한명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양부모의 무관심에 자신의 뿌리에 대한 궁금증으로 한국에 갈 돈을 마련하겠다며 카지노에 빠져들었다가 거액의 빚만 졌습니다. 양부모와 크게 싸운 뒤 집을 나왔지만 빚 때문에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고, 대학도 갈 수 없었습니다.


귀도 스튜벨/네덜란드 입양인

학력이 필요없는 단순 노동을 했습니다. 창고 정리나 건축현장 인부...


요즘 귀도는 직장에 갈 때만 빼고는 방안에서 음악만 들으며 아무도 만나지 않습니다. 자신을 완벽한 이방인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귀도 스튜벨/네덜란드 입양인

최근 몇 년 동안은 사람들이 두려웠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선 왠지 불편해요. 사람들끼리 쳐다보게 되는 것도 싫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도 싫어요. 지금 나에겐 친구가 없어요.

친구가 없다고요?

없어요.

혼자 살고? 네

지난 크리스마스엔 뭘 했는지?

잤어요.


윤용철 기자: 따돌림에 시달린 그들의 어린 시절을 보면 현지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입양인들이 저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살아가는 건 아니겠죠?


전영우 기자 : 네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직업을 가지고 현지사회에 잘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입양인들이 훨씬 많은 듯 합니다. 정확한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현지 입양인단체에서는 약 5에서 10% 정도가 방금 보신 것 같이 절대적인 빈곤과 같은 문제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윤용철 기자 : 물론 입양인 개인의 노력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겠지만 상처를 안고 있는 그들을 어떻게 잘 헤아려서 키워나갈 것인지 양부모들의 역할도 상당히 중요하겠군요.



전영우 기자: 입양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어떤 가정에 입양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입양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현상을 로또복권에 비교하기도 하는데요. 자신들의 선택권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순전히 행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자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취재진은 입양한 가정에서부터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입양인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벨기에 브뤼셀

벨기에에 사는 꺄띠 민정은 6개월전 아들 마티를 얻었습니다.


꺄띠 민정/김민정

74년 서울 출생, 77년 벨기에 입양


모로코계 벨기에 사람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입니다. 하지만 꺄띠에게 행복이 시작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지난 74년 한국에서 아버지의 불륜으로 태어났습니다.


꺄띠 민정/벨기에 입양인

친엄마가 저를 2년 동안 길렀어요. 하지만 더 이상은 불가능했어요. 아버지가 엄마를 더 이상 도와줄 수 없었거든요.


결국 가족의 버림을 받은 꺄티는 3살때 벨기에의 한 농가로 입양됐습니다.


꺄띠 민정/벨기에 입양인

저는 양부모가 꿈꾸던 아이가 아니었어요. (부모님의 기대와) 너무 달랐어요.


꺄띠는 양부모가 기대했던 깜찍하고 귀여운 동양아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꺄띠 민정/벨기에 입양인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도 아니였어요.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항상 굳은 얼굴로 웃지도 않았어요.


귀여움을 받지 못했던 아이, 꺄띠. 11살 때 양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은 뒤에는 집안의 궂은 일을 모두 떠맡아야 했습니다. 입양된 딸이 아니라 하녀에 가까운 생활이었습니다.


꺄띠 민정/벨기에 입양인

매일 아침 학교 가기 전에 집안 일을 해야 했어요. 아침 6시에 식구 중에 제일 먼저 일어나 아침준비를 하고 학교 가기 전에 농장의 가축들에게 먹이도 주고 청소까지 다 해야 했어요.


양부모의 매질에도 시달려야 했습니다.


꺄띠 민정/벨기에 입양인

부모님은 내가 십대가 되지 시작하자 때리기 시작했어요. 몸 전체를요. 화가 나면 막 때렸어요. 매일 전쟁을 치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너는 예쁘지도 않고 우리 딸도 아니고 그저 외국인이야. 우리가 널 키우지 않았다면 넌 가난한 아이다. 매일 이런 말을 듣는 건 매우 힘들었어요.


탈출을 꿈꾸는 건 당연했습니다.


꺄띠 민정/벨기에 입양인

나의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언젠가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악몽이 언제쯤 끝날까... 18살이 되면 이런 일이 끝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벨기에에서 18살이면 성인이거든요. 18살이 되면 집을 나가야지.

그러면 (이런 생활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단 한가지 생각만 했어요. 열여덟살, 열여덟 살만 되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외곽


옌틀 드 헤르토흐/김효림

85년 출생, 86년 네덜란드 입양


올해 우리 나이로 21살이 된 옌틀 드 헤르토흐, 한국 이름 김효림씨는 자신을 낳아준 친어머니가 가출한 뒤 네덜란드로 입양됐다가 다시 네덜란드 고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입양이 됐다가 쫓겨난 것입니다.


옌틀 드 헤르토흐/네덜란드 입양인

첫번째 양아버지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어요. 술을 많이 마셨어요. (입양된 뒤) 전 매일 울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를 그 가정에서 내보낸 거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입양에 나선 탓입니다. 친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양부모로부터도 버림받은 효림씨.

그 뒤 다시 네덜란드인 위탁부모인 헤르토흐씨 부부가 그녀를 거뒀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상처를 입은 그녀가 사춘기를 거치며 탈선에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옌틀 드 헤르토흐/네덜란드 입양인

14살때 비뚤어진 친구들을 만났어요. 마약에도 손을 댔고 가족에게 공격적이었어요.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3년 넘게 그렇게 지냈어요.


헤르토흐 부부는 나중에 옌틀을 정식으로 입양했고 새로운 양부모의 관심과 배려로 그녀는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2억 만리에서 어릴 적 겪었던 상처는 쉽게 아물기에는 너무나 컸습니다.



윤용철 기자 : 어디 하소연할 가까운 친구나 친지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입양됐다가도 양부모의 미움을 받아 쫓겨난다면 그 고통은 상상할 수도 없겠네요.


전영우 기자: 예 그렇습니다. 그나마 유복한 환경에 좋은 부모를 만난 입양인들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가 한층 수월했습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들도 정신적 혼란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빠져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벨기에에 사는 클래식 기타리스트 데니스 성호씨는 30년 전, 태어난 지 9개월 되었을 때 입양되었습니다.


데니스 성호 양어머니

데니스를 처음 봤을 때 내가 아기를 낳은 것처럼 기뻤어요.



데니스 성호/신성호

75년 서울 출생, 75년 벨기에 입양


양부모님은 외아들인 데니스 성호씨에게 모든 정성을 쏟아 훌륭한 음악가로 키웠습니다.

유럽공연장협회는 데니스 성호를 떠오르는 젊은 음악가상 후보로 선정했습니다. 미국 카네기홀을 비롯해 독일과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연주회를 가졌고, 음반도 벌써 석장이나 냈습니다.



데니스 성호/벨기에 입양인

양부모님이 저를 보호해주셨고 항상 사랑과 친절로 대해 주셨죠.


그러나 좋은 양부모 밑에서 잘 자란 그도 철이 들 무렵 심각한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데니스 성호/벨기에 입양인

무엇인가를 잃은 것 같은 느낌이 자꾸 강해졌어요. 양어머니와 문제가 있었어요. 양어머니와 문제가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친어머니가 저를 버린 것에 화가 났기 때문인 것 같아요.


분노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했습니다.


데니스 성호/벨기에 입양인

모든 걸 부숴버렸어요. 창문도 부수고 집안 물건을 1년에 두세번씩 부쉈어요. 소리도 많이 질렀죠.


자신이 버려졌다는 고통을 잊기 위해 폭음도 하게 됐습니다.


데니스 성호/벨기에 입양인

어떤 때는 쓰러질 때까지 술을 마셨어요. 맥주 20병이나 위스키 한병을 빨리 마셨어요.


기억조차 없는 고국과 낳아준 어머니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은 지금도 그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데니스 성호/벨기에 입양인

제가 어머니 뱃속에 있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 친어머니를 용서해요. 정이 중요하니까요. 친어머니를 용서하고 싶어요. 저는 양식이 있는 사람이고 어머니도 그럴 거예요. 혈육이니까 닮았을 거예요.



오드 레스파냐/김세영

68년 파주 출생 추정, 69년 벨기에 입양


벨기에에 사는 입양인 예술가 오드는 혼혈아로 추정됩니다. 지난 1968년 미군부대가 있는 경기도 파주로 미아로 발견된 뒤 벨기에로 입양돼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벨기에인 남편과 결혼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를 낳고 나서 생겼습니다.



오드 레스파냐/벨기에 입양인

제 딸이 태어났을 때 눈이 너무 가늘었어요. 그래서 둘째는 훨씬 더 서양인과 비슷한 외모를 가졌겠지 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생각과는 반대로 둘째는 더욱 동양인 같았어요. 눈은 훨씬 더 가늘었고 머리 모양도 동양아이 같았죠. 저나 제 남편을 하나도 안 닮은 것 같았어요.


딸 엘루이즈는 자신을 아시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루이즈/오드씨 딸

우리 반에서 아시아인은 저 하나예요. 아랍에서 온 애도 있지만 저처럼 눈이 옆으로 찢어진 아이는 없거든요. 한국에 가면 저처럼 생긴 사람들이 많아서 좋을 것 같아요.


외모 때문에 학교에서 봉변을 당하기도 합니다.


엘루이즈/오드씨 딸

저를 때린 아이들은 모두 한패였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전 말도 못하고 감옥살이를 하는 것 같았죠. 한번은 애들이 저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때리기도 했어요.


미술가로 성장한 입양인 오드. 그러나 입양인의 문제는 2세대로까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윤용철 기자: 입양인들의 문제가 2세에까지 이어지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입양인들 거의 모두가 한국에 대한 어떤 갈증과 향수를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우리가 도와줄 방법은 없는 건가요?


전영우 기자 : 많은 입양인들이 친부모를 만나길 희망하고 또 한국을 방문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80년대 중반 이전에는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서 이들이 핏줄을 찾는다는 게 그렇게 게 쉽질 않습니다. 본인들이 입양서류를 잘 보관하고 있지 않다면 ‘내가 원래 한국인이다’ 이렇게 주장하기도 힘든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한국과 자신을 낳아준 친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막을 수 없기에 일부는 자비를 들여 한국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따스하게 안아줄 프로그램이 거의 없다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한국에서 열린 해외입양인 모임)

많은 해외 입양인들이 한국을 찾고 있습니다. 자신의 뿌리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입니다. 한푼 두푼 돈을 모아서라도 한국에 옵니다. 귀도는 지난 2003년 그동안 모은 돈을 모두 털어 약 30년만에 한국을 찾았습니다. 자신의 고향이라고 추정되는 부산 거리를 2-3분 동안 하루종일 무작정 걸어다녔습니다. 행여나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기대에서였습니다.


귀도 스튜벨/네덜란드 입양인

기적을 바라고 있었죠. 기대할 순 없었지만... 작은 희망이었습니다. 내 삶의 목표는 친부모를 찾는 겁니다. 그게 내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그게 내가 지난 세월동안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가장 그리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힘든 사람들일수록 한국에 와서 살기를 더 간절히 원합니다.


귀도 스튜벨/네덜란드 입양인

이곳 생활을 다 정리하고 내가 네덜란드에 입양될 때 가지고 온 한국여권과 가방을 들고 한국에 가서 '갈 곳이 없으니 책임져‘라고 해볼까도 생각했었습니다.

그게 언제였는지?

3개원 전쯤... ‘네덜란드여 안녕. 다시는 안 온다’ 그러나 난 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원한다면 한국 국적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피아노를 전공한 벨기에 입양인 알렉산드라. TV에 모습이 나가면 친부모가 자신을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흥분됐다고 털어놨습니다. 취재진의 전화를 받은 것마저도 그녀에게는 가슴 뛰는 일이었습니다.


알렉산드라/벨기에 입양인

전화로 연락 받은 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우리 모습이 방송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궁금하고... 이 프로그램이 방송되면 ‘친부모님들이 우리 모습을 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옌틀의 소원은 자신의 잃어버린 마지막 한 조각, 가출한 어머니를 만나는 것입니다.


옌틀 드 헤르토흐/네덜란드 입양인

엄마를 찾고 싶은 이유는 제 자신의 평화를 위해서인 것 같아요. 어떻게 생기셨는지 알고 싶어요. 전 엄마의 코와 눈을 갖고 있어요. 그게 왜 중요한지 설명할 순 없지만 저에게는 중요해요. 아마도 마음의 평화를 원하는 것 같아요. 제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지만 내적으로는... 엄마를 원해요.


부모를 찾은 사람들도 한국을 알게 될수록 한국 사람들 속에서 묻혀 살고 싶어 합니다. 폭식증을 이기고 그 사연을 책으로 펴낸 조이 윤씨도 어머니 곁에 살고 싶어 한국에 왔었지만, 적응하기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 대신 네덜란드에 있는 한국 회사를 선택했습니다.


조이 윤/네덜란드 입양인

한국 사람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싶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하고 싶어요. 더 늦게까지 일해도 괜찮아요. 한국 회사에, 한국사회에 대해 더 큰 책임감을 느껴요. 한국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고 싶기 때문에 한국 회사에서 일하면서 아주 적은 것이라도 한국사회,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되고 싶어요.


한국에 대한 욕구는 다양한 형태로 표출됩니다. 많은 한국 입양인들이 임신을 하게 되면 한국 음식을 무척 먹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스웨덴 변호사 마커스 정과 부인인 김일주씨도 올해 아이를 가지게 되면 한국 음식을 많이 먹을 작정입니다. 2세들에게 그렇게 해서라도 한국을 느끼게 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김일주/스웨덴 입양인

아이를 갖게 되면 한국 음식, 김치를 먹고 한국 음악을 들을 거예요. 우리아이도 우리처럼 스웨덴에서 자라겠지만, 그들의 중요한 일부가 될 또 하나의 조국을 가지는 거죠. 아이들을 해외로 보내도 그들은 여전히 한국입니다. 계속해서 한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윤용철 기자; 네, 버림을 받고도 한국을 그토록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니까 왠지 미안해지는군요. 그러나 전영우 기자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야 해외입양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이해가 되지만, 먹고 살기가 한층 수월해진 지금까지 해외입양인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전영우 기자: 유럽에서 만난 해외 입양인들도 그 점을 아주 강하게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왜 아직까지도 자신들처럼 견디기 힘든 아픔과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계속 만들어내냐는 겁니다.



1953년 전쟁고아 4명

최초로 해외 입양

우리나라에서 해외입양이 시작된 것은 6.25가 끝나던 해인 1953년. 이때 전쟁고아 4명이 최초로 해외로 입양된 이래 2004년에는 2천258명이 2억만리 낯선 땅 양부모에게 보내졌습니다.


지금까지 해외입양인의 숫자는 모두 15만 6천여명, 국내 입양인 총수 6만6천여명에 6.5배에 달해 중국, 러시아, 과테말라에 이어 세계 4위입니다.

2003년 국가별 입양현황 (미국 입양인 수치)

1. 중국 6,800여명

2. 러시아 5,200여명

3. 과테말라 2,300여명

4. 한국 1,700여명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


스웨덴 입양인 토비아스씨는, 한국이름으로 이삼돌씨는 지난해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한국의 해외입양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토비아스 후비네트/이삼돌

71년 출생, 71년 스웨덴 입양


이씨는 1971년, 생후 1개월 때 전라선 기차 안에서 발견돼 스웨덴으로 입양됐습니다. 이씨의 박사논문 제목은 ‘고아 국가를 위로함’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파격적입니다.

‘고아 국가를 위로함’ (논문 표지와 함께)


토비아스 후비네트/네덜란드 입양인

한국으로부터 입양아를 받고 있는 나라들은 전부 한국 전쟁 중 남한을 도왔던 나라들입니다. 그 나라들이 한국 아이들을 데려가고 있는 건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은 정치 경제적으로 한국의 중요한 동맹국이거든요. (과거에 조공을 바치듯) 사람을 대규모로 외국으로 보내는 일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그는 전 세계적인 입양 산업망이 존재하며, 한국의 의료와 입양 운송체계가 잘 갖춰져 있어 고가의 입양아를 수출하는 고품질의 입양아 공급원이라고 주장합니다.


토비아스 후비네트/네덜란드 입양인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경우는 아이들이 대부분 가난한 환경에서 산부인과 아닌 그냥 집에서 의사도 없이 태어납니다. 아이들이 아픈 경우가 많죠. 그게 중국이나 베트남 아이들의 가격이 낮은 이유입니다.


아프리카보다 남미보다 동양 아동을 선호하는 이유도 설명합니다.


토비아스 후비네트/네덜란드 입양인

서양인들은 동양 아이들이 귀엽고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루기 쉽다는 생각을 해요. 말을 잘 들으니까요.


과거 한국은 고아, 미아를 외국에 입양시킴으로써 정부예산을 절약할 수 있었다고 분석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득보다 실이 많다고 주장합니다.


토비아스 후비네트/네덜란드 입양인

한국은 가난한 이미지를 갖고 있어요. 전 계속되는 해외입양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스웨덴인들이 삼성을 일본기업이라고 생각해요. 백인 부모 손을 잡고 가는 한국 입양아들을 길에서 매일 보는데 당연히 한국이 매우 가난한 나라일 거라고 생각하죠.


입양인들은 한국 정부의 결정으로 많은 아동들이 해외로 나간만큼 최소한의 입양 후 프로그램이 절실하다고 호소합니다.


마커스 정/스웨덴 입양인. 변호사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는 심각한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한국과 스웨덴 정부 모두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전문적인 상담 같은 입양 후 관리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나아가 국내 입양이 적은 이유가 핏줄을 중요시하는 문화 때문이라며 이제 그 문화를 바꿀 때라고 강조했습니다.


베라스 땅기/벨기에 입양인

아직까지 한국 정부는 해외입양을 허락하고 있는데 이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한국은 OECD 회원국이고, 최고는 아니지만 세계에서 부유하고 발전된 나라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해외입양을 보낼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을 행복한 벨기에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한국에 특별한 관심이 없다는 한 입양인은 그러나 현재 해외입양제도에 대해서만은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플로랑스/벨기에 입양인

(해외입양은) 살과 피를 파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 인생은 인생입니다. 인생을 갖고 장난 칠 수는 없어요.


한국 입양인을 키운 입양인 어머니는 한국정부와 국민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네트 퓨샤/ 한국 입양인 어머니

자기 아이들을 보살피세요. 버려진 한국 아이들을 입양하세요. 뿌리가 없는 아이는 완벽하지 않아요. 아무리 많은 사랑을 줘도 말이죠.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계속되고 있는 해외입양에 대해 국내에서도 많은 비판이 있습니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잘 사는 나라인데 왜 아직도 해외입양을 계속 보내느냐는 입양인들의 질문에는 취재진도 딱히 할 말이 없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뿌리를 찾아 한국에 돌아왔지만 환대받기는커녕 문화적 차이와 언어적 문제 등으로 방황하고 있는 해외 입양인들의 실태를 계속해서 뉴스 에프터 서비스 해드리겠습니다.


윤용철 기자 : 지금까지 우리가 해외로 떠나보낸 입양인들의 숫자가 15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들의 얼굴을 마주대하기가 왠지 부끄럽고 미안해집니다.

얼마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우리도 이제 해외입양을 중단할 때가 됐다’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찬 새해, 당장 올해부터라도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의 아이들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엔딩 스크롤과 함께


귀도 스튜벨/ (오경문)

1972년생

75년 부산에서 발견

네덜란드로 입양


토비야스 후비네트(이삼돌)

1971년생

전라선 열차안에서 발견

스웨덴으로 입양

옌틀 헤르토흐(김효림)

1985년생

친어머니를 찾고 있음

네덜란드로 입양


데니스 성호(신성호)

1975년생

벨기에로 입양

오드 레스파냐(김세영)

1968년생

경기도 파주서 발견

벨기에로 입양


로멩 푸샤(김서훈)

1972년생

74년 서울 용산구서 발견

벨기에로 입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