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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구본주의 작품들

by eunic 2005. 12. 23.
열심히 사는 사람들 밤하늘 별처럼 우러러보게
[레이버투데이 2005-02-18 11:45]
서른일곱의 짧은 삶을 굵게 살다간 청년작가 구본주가 마지막으로 준비했던 작품 ‘별이 되다’는 형광 폴리코드로 만든 자그마한 샐러리맨 조각 1천개를 천장에 매단 설치작품이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밤하늘의 별처럼 우러러 보게 하겠다던 구본주. 그가 별이 되었다.

이제 막 본격적인 작품세계를 펼칠 나이에 아깝게 요절한 청년작가 구본주는 리얼리즘 미술운동이 무르익던 80년대 말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리얼리즘 조소예술의 굵은 선을 남겼으며, 형상조소예술의 맥락에서도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학생 시절의 작업들을 포함해서 구본주의 작업 여정은 20여년에 이른다.

▲ 1천개 형광 샐러리맨 '별이 되다'의 일부.


혁명적 낭만주의자이자 조소 예술가

구본주는 80년대 후반 변혁기의 격동을 받아들이면서 리얼리즘 미술운동의 격랑에 몸을 실었다. 학생미술운동에 참여하고 대학가 시위에 참여하면서 현실에 눈을 뜬 그는 한 때 수원에서 현장미술운동에 몸을 담기도 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는 예술가로서 한 생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 후 구본주는 혼신의 힘을 쏟은 첫 번째 개인전 <존재와 의식>에서 리얼리즘 조소예술가로서의 탄탄한 실력을 선보였다.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샐러리맨의 비애를 담아 같은 주제의 개인전을 열면서 절정의 기량을 선보였다. 세 번째 개인전에서는 ‘아버지’를 주제로 한 자본주의 한국사회의 현실을 드러내는 작품들로 작품 세계를 넓혀나갔다.

그가 살아온 시대의 격랑은 근대와 탈근대가 혼재한 격변의 사회사적 배경을 고스란히 청년 구본주에게 안겨주었다.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겪었으며 분출하는 사회적 욕망이 집단적인 변혁의식으로 드러나던 시기였다. 이러한 변혁의 시대에 직면해서 구본주는 진보운동 진영에 몸담은 ‘좌파 예술가’로 출발했다.

그 속에는 수많은 좌절과 고뇌가 담겨 있다. 습작기에 해당하는 90년대 초반 이전의 작업들은 탄탄한 사실적 묘사력을 바탕으로 인체조형의 본질을 탐색하는 과정일 뿐더러 무모하리만치 도전적인 기호들로 가득차 있다. 이후 공모전을 통해서 본격적인 작업 궤도에 오르면서 전업 예술가로서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그는 20대 초반의 초심을 향해서 끝없이 구심력의 발동을 갈구했다.

▲ 구본주 데드마스크.
이러한 이념적 토대 위에 구축된 그의 작업들을 상징적 수사로 표현하자면 혁명적 낭만주의라고 말할 만하다. 90년대 초반의 세계사적 격동은 한국현대사에도 커다란 지각변동을 야기했다. 변혁운동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던 현실사회주의의 패퇴는 당연히 모든 영역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현실 사회에서의 변화가 예술가 구본주를 전혀 다른 세계로 이끌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첫 번째 개인전에 ‘존재와 의식’이라는 부재를 달았다.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칼 마르크스 자본론의 생산양식론의 유명한 테제를 가져다 쓸 정도로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진 작가였다. 구본주는 예술가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혁명적 낭만주의로 세웠음을 의미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맥락은 형상조소예술의 차원이다. 작품의 구도를 잡을 때 탄탄한 사실적 묘사를 바탕으로 전형적인 인체의 동세를 잡아내는 것에서부터 가로나 세로로 길쭉하게 내뻗으면서 하나의 팽창하는 인체의 공간성을 잡아냄으로써 역동성을 구현해낸 것이 그의 작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구상인체의 아카데믹한 조형방법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되 그 속에 감성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음으로써 예술가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극대화하는 조형 흐름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인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인간을 다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인체와 인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항목으로는 옷을 꼽을 수 있다. 초기의 인체 습작들이 옷을 벗은 모습이었다면 본격적인 작품들은 특정 계층이나 취향을 대변하는 의복을 갖춘 모습들로 변화해갔다. 인체에 계급·계층 의식을 가진 인간의 모습을 부여한 것이다.

인체 자체의 동세와 근육 표현이 보다 근원적인 인체 탐색의 장이라면, 구본주의 조소작업은 인체가 아닌 인간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초기의 그는 노동자 농민 같은 기층 민중의 형상을 담아냈다. 이후 샐러리맨이나 아버지 등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당대의 현실을 아우를 수 있는 인간의 면면을 담고자 했다. 옷을 벗은 인체와 옷을 입은 인간 사이의 간극은 계급이나 계층의 모습을 감추느냐 드러내느냐 하는 극적인 대비효과를 낳았다.

솟구치는 힘과 넥타이를 맨 노동자

구본주는 세 차례의 개인전을 통해서 진보적인 예술가의 풍모와 장인적 기질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첫 번째 개인전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은 혁명적 낭만주의의 역동성을 가진 일련의 작업들이다. 특히 ‘갑오농민전쟁’은 그가 대학 시절부터 소품 에스키스(esquisse)를 통해 꾸준히 습작 과정을 거쳐 만들어낸 역작이다.

▲ '갑오농민전쟁'(1994).
한쪽 발을 앞굽이 자세로 내뻗으며 마치 대지를 움켜쥔 듯한 역동적인 자세이며, 뒷발은 균형을 잡기 위해 긴장감 속에서 힘을 받혀주는 팽창의 기운을 담고 있다. 정면을 향하고 있는 몸통은 굵은 몸 선은 물론이고, 섬세한 몸의 흐름을 잡아낸 인체의 골격이 가히 일품이다.

머리 위로는 두 팔로 죽창을 움켜쥐고 내지르기 직전의 긴장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갑오농민전쟁이라는 역사적 텍스트를 빌어서 인체조형의 ‘솟구치는 힘’을 표현한 이 작품은 신체표현의 조형적인 맛을 근저에 깔고 있다. 이와 함께 저항과 혁명의 에너지를 기념비적인 작품에 담아낸 청년작가의 야심을 읽어낼 수 있다.

80년대적 정서를 고스란히 간직한 노동자 농민의 모습은 ‘넥타이를 맨 노동자, 샐러리맨’으로 대체된다. 샐러리맨은 초기의 혁명적 낭만주의를 변용한 구본주의 90년대식 아이콘이다. 노동자 농민의 형상이나 동학농민운동과 같은 혁명적 낭만주의의 서사성은 ‘배대리의 여백’ 이래 넥타이를 맨 노동자, 샐러리맨으로 변모한다.

▲ '노동자의 깃발'(1990).
현장투신을 모색하며 노동운동가를 꿈꿨던 그가 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했을 때 그는 이미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을 것이다. 산업사회의 전형적인 노동자상은 공장노동자의 전형성만 대변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도시산업사회에서 고단한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 샐러리맨의 모습을 통해서 80년대적인 상투적 리얼리즘에서 탈피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탄탄한 사실적 묘사력을 바탕으로 주로 길쭉하게 형상을 왜곡하는 일러스트 기법을 입체조형에 도입함으로써 극도의 긴장감을 조성해낸 것이 그것이다.

매체와 기법의 탁월함은 구본주에 대한 상찬의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이다. 구본주의 손은 거침없이 흙이며 나무, 쇠, 동판 등의 재료들을 주물렀다. 초기 습작 시절에는 흙 작업으로 탄탄한 사실성이 돋보이는 작업을 선보인 그는 본격적인 작업에 임하기 시작하면서 나무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는 나무를 통해서 속도감 있게 조형적 성과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을 택했다. 뿐만 아니라 작은 각목들을 접합해서 독특한 맛을 냈다. 게다가 얼굴이나 손, 발과 같은 부분을 별개의 나무로 사용함으로써 통나무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점도 특이하다.

▲ '유월'(1994).


쇠를 다루는 구본주의 처절한 노동에서는 경탄을 금치 못한다. 통 쇠를 두드려서 만든 ‘유월’을 보면, 돌을 움켜쥔 손은 마치 흙 작업을 주물로 떠낸 것 같다. 딱딱한 매체를 연성화한 지난한 노동의 손길을 실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두꺼운 쇠 철판을 두드려서 옷의 선을 만든 것 또한 가히 초인적인 힘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힘이 아니라 정교한 기술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숙련된 장인의 기교가 쌓여 엄청난 힘을 발산하는 영민함이 돋보인다. 힘으로 작업하는 작가라는 세간의 평을 받은 그는 사실은 정교한 기술과 명민한 두뇌플레이로 일관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선보인 힘의 미학은 철저한 계산에 의해 산출된 결과이며, 숙련된 기교의 섬세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초기작에는 브론즈로 뜬 작품이 드문데 이것은 재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젊은 작가이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난히 철과 나무가 많은 것은 매체적 특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인다. 동판 또한 색의 변화를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쇠에 비해서 용이하게 표현 효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구본주 작업의 주요 매체로 자리 잡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 '노동'(1990).
두 번째 개인전 <존재와 의식>(원서갤러리, 갤러리사비나, 1999)은 절정의 손맛을 선보인 중요한 대목이다. 이 전시의 백미는 손의 표정을 담거나 신발, 얼굴 부분 등 극도로 절제된 형상표현이다. ‘절망’, ‘숨은 그림 찾기’, ‘위험한 상상’과 같이 손의 모습을 통해서 이야기 구조를 끌어내거나 ‘시작하는 손’, ‘시작한 손’, ‘너무나 간절하고 애절한 그는’과 같이 절제된 형상 요약으로 손의 표정만으로 이야기를 건네기도 한다.

‘철판을 열심히 두드리고 자르고 휘어서 형상화 했다’는 ‘연인-신림장 여관’이나 ‘가족-편안한 귀가’와 같이 철판의 두께와 용접기의 흔적, 망치질의 흔적을 통해서 진하게 인간미 넘치는 신발 몇 켤레를 남기기도 했다. ‘이게 웬 날벼락’은 20세기말 한국자본주의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국제금융기구의 철퇴를 맞고 휘청거리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담은 것이다. ‘그는’이라는 작품은 ‘황동과 적동, 백동을 열심히 두드린 방짜기법을 사용해서 형태를 만들었다’고 작가는 적고 있는데 동판 재료와 방짜기법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이 시기에는 절정의 형상조소작업을 탄탄하게 갈고 닦아낸 그의 솜씨가 한없이 빛났다.
길쭉하게 늘어난 형상왜곡이 심화되면서도 조형적으로 일러스트 기법을 도입함으로써 경쾌한 동세를 만들어냈다. 동판과 철판을 두드려 형상을 만드는 단조기법과 목조각의 절묘한 소조 작업의 무르익음이 극대화된 시기이다. 부분적인 사실적 묘사를 통해서 절제된 형상 설정을 보여준 점이나 인체 변형이 극대화 한 점 등 가히 절정의 기량을 뽐낸 것이다. 20세기말 이미 절정의 기량을 선보인 청년작가의 완성을 보여주었음을 깊이 회고하게 된다.

▲ '별이 되다'(2003).


세 번째 개인전 <우리시대의 표정 : 아버지>(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2002)는 IMF 이후 침체된 가부장 남성들의 이미지들을 담고 있다. 큰 조각의 웅장한 힘과 작은 조각의 섬세한 맛이 잘 살아난 전시다. 철판을 두드리고 이어 붙여 5미터 길이의 거대한 구두를 만든 ‘하늘’은 거대하면서도 텅 빈 가부장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절정의 힘과 넘치는 기량, 느긋한 땀방울을 실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 '아빠의 청춘'(2001).
‘디 앤드’는 퇴근하는 길에 불을 끄면서 자기 자리를 돌아보는 중년 샐러리맨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빠의 청춘’이나 ‘위기의 남자’ 연작은 몸통과 사지에 손과 발, 얼굴 등을 끼워 맞춤으로써 자연스러운 동세를 유도했던 구본주 특유의 방법을 목조각에 적용한 성공적인 사례이다. 그는 ‘시스템에 버림받은 주인 없는 개들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는 믿고 싶다. 자신의 시스템이 완벽하기를. 그러나 그는 안다. 그 시스템이 얼마나 불안한지’라며 시스템으로부터 소외당한 왜소한 가부장 남성의 모습을 버림받은 거리의 개에 비유하고 있다.

가족, 가부장, 샐러리맨 등의 요소를 배치한 이 전시에서 구본주는 전시장 전체를 하나의 서사 구조로 만들기 위해서 전시장 입구의 바깥 공간부터 벽면과 중심공간은 물론 바닥과 천장에 이르는 공간 구성을 시도했다.

▲ '파업'(1991).


구본주, 그가 별이 되다

구본주는 휴머니즘을 안고 형상예술의 방법으로 리얼리즘 미술을 추구한 내용적 진보주의자였다. 구본주의 예술세계를 가늠하는 가장 큰 잣대는 휴머니즘이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환경이 규정하는 바, 그의 휴머니즘은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앞세우기보다 인간 자체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것일 뿐더러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다.

▲ '별이 되다' 원본으로 사용된 나무조각 작품.


예술 방법론에 입각한 규명은 형상조소예술의 맥락에서 출발한다. 그는 80년대 이래 발흥한 형상조형의 세례를 받은 작가이다. 그의 스승인 류인 이래 90년대 형상조소예술을 이어온 중요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점은 각별히 기억해 두어야 할 지점이다. 리얼리즘 미술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그의 성과 또한 구본주 예술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일관된 기조이다.

그는 학생시절 소비에트연방이나 중국, 북한의 리얼리즘 미술의 영향과 80년대 민중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학생미술운동 이래 현장미술활동을 포함해 전업 작가 생활을 하면서도 일관되게 현실비판의 맥락을 주제화했다.

리얼리즘적 태도는 그가 추구했던 정치적 진보주의나 형상미술의 방법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계급성을 드러내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노동자 농민의 모습을 샐러리맨으로 전환하면서 다소 유연하게 보여주었던 계급성에 대해서 구본주는 “내년에 선보일 개인전에서는 첨예하게 계급성을 드러내는 전시를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 '혁명은 단호한 것이다'(1990).


20대의 구본주를 형성했던 계급의식을 본격적으로 풀어내야겠다는 소명의식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숙제를 남기고 어느 날 갑자기 작고 작가가 되었다.

그의 마지막 작업 가운데 하나가 ‘별이 되다’이다. 내용적 진보주의와 형상조소예술의 방법론으로 절정을 향해 치달았던 구본주. 그가 별이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를 기리는 마음들이다. 남은 이들이 현실과 예술을 대하는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것은 그가 남기고 간 꿈을 가슴 속에 새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준기

ⓒ1993-2005 매일노동뉴스 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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