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마초 학교 수강생 모집 |
[한겨레]2004-11-03 06판 23면 1929자 오피니언·인물 컬럼,논단 |
지난 9월 서울 법대 1학년들을 대상으로 법조계 문화에 관한 특강을 했다. 화제가 결혼풍속 쪽으로 흐르다 보니 “여러분이 지금은 스스로를 진보적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법연수원을 마칠 때쯤이면 다수가 마담뚜의 도움을 받아 아내를 얻게 될 것”이라는 반농담의 예언까지 하게 되었다. 딴에는 지금의 순수함을 잃지 말라는 경고로 덧붙인 이야기였다. 강의 끝나고 한 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여기 앉아 있는 법대생의 40퍼센트가 여학생인데, 교수님은 왜 모든 청중이 당연히 남학생인 것을 전제로 그런 이야기를 하시나요?” 아차 싶었지만 주워 담을 수도 없어 즉시 사과한 뒤 “강의 중에 성차별적인 내용이 또 있었으면 지적해 달라”면서 전자우편 주소를 남겼다.짤막한 사건이었지만 한동안 그 일이 잊혀지지 않았다. 우선은 억울했다. ‘내 또래에 나만큼 깬 남성도 흔치 않을 텐데, 진심을 몰라주고 그런 사소한 일로 시비를 걸다니.’ 마침 몇몇 남학생들로부터 “별로 잘못하신 것도 없는데, 그 친구들이 괜한 트집을 잡았다”는 식의 격려 편지도 받았기 때문에 억울함을 정당화할 근거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양심의 소리는 적당히 넘어가려는 나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그 소리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청중의 절반 가까이를 ‘투명인간’으로 대접한 강사의 오류는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남녀의 차이에 눈뜨기 시작한 사춘기부터 내가 속했던 모든 집단은 남성의 비율이 95퍼센트를 넘었다. 중고교, 법대, 군대, 법조계, 심지어 지금 속해 있는 교수 집단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게 여성들과 사실상 격리된 세상에 살면서도 스스로를 차별의 주체로 생각해 보지 못했다. ‘또 하나의 문화’를 애독하고 박완서를 사랑해온 나는 확실히 주변의 강성 마초들보다 훨씬 괜찮았으므로 충분히 자신 있었다. 물론 주제 파악의 기회도 없지는 않았다. 결혼 직후에는 맞벌이하는 아내에게 설거지를 ‘도와주겠다’고 했다가, 그냥 ‘하면’ 되지 뭘 ‘도와주냐’는 핀잔을 들었다. 비슷한 일이 몇 번 반복되었건만 내 자신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 거야 표현상의 사소한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몇 년의 전업주부 생활과 가사 분담 경험은 그런 자신감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러나 이번 일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 자신감은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힘없이 무너졌다. 같은 편으로 굳게 믿었던 아내가 “당신, 언제 한번 당할 줄 알았다”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 웃는 것 아닌가? 기가 막혔지만, 결국 솔직하게 나의 한계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 부인하지 말자, 머릿속 깊이 뿌리박은 차별의 언어습관들을 표현상의 사소한 문제로 돌리려는 것 자체가 펄떡거리는 마초 근성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오래전에 고장나버린 내 머릿속의 ‘성 차별 감지장치’를 덜렁거리며, 이 땅 여성들이 겪고 있는 일상 속의 차별을 이해할 수 있노라 큰소리 쳐 온 것도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걸 깨닫고 나니, 내 수업의 몇몇 남학생들이 지난주 성매매특별법 관련 발제를 하면서 속옷만 걸친 집창촌 여성들의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삼은 것을 보고도 그 남학생들을 심하게 비난할 수 없었다. 내 지적을 받고 즉시 발표 자료를 폐기해준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성차별 없는 세상을 구경도 못해본, ‘작동불능의 성차별 감지장치’ 소유자라는 점에서 그 친구들도 나와 똑같은 마초들일 뿐인데 누가 누구를 손가락질하랴 싶어서였다. 어느덧 ‘또 하나의 문화’가 20돌을 맞았다. 어려운 싸움을 시작한 선각자들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우리 같은 전·현직 마초들을 쉽게 포기하지 말고 배움과 실천의 기회를 나눠 달라는 부탁을 드린다. ‘개과천선을 바라는 마초 학교’라도 열어준다면 기꺼이 참여하겠다. 의사소통이 단절된 ‘마초들의 천국’에서 숨막혀할 ‘내 딸의 지옥’을 미리 막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 진심이다. 김두식 한동대 교수·변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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