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유언장을 쓰는 부모들 |
[한겨레]2004-08-04 06판 23면 1936자 오피니언·인물 컬럼,논단 |
얼마 전, 정신지체, 자폐 등 발달장애를 지닌 아동들의 부모 모임인 ‘기쁨터’에서 동료 변호사가 특강을 하게 되어, 나도 동행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장애인 가족이 알아두면 도움이 될 법률상식에 관한 그의 열띤 강의가 끝나자마자, 부모님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아이의 장애를 알고 나서, 우선 돈부터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우리 부부가 죽고 나면 아이를 위해 유산을 관리해줄 제도적 장치가 있나요?” “아이가 성인이 될 때를 위해 공동체를 준비하려면, 어떤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하나요?” “아이가 문제행동으로 누군가를 다치게 하여 경찰서에 갈 경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등등 질문은 끝이 없었다. 부모님들은 자신들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장 궁금해 했지만, 부끄럽게도 우리들 두 변호사의 답변은 ‘아직까지 그런 제도들이 정착되지 못한 상태이므로, 일단 유언장이나 잘 정리해보자’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돌이켜 보면 최근 몇해 동안 장애인 인권운동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다. 시혜를 거부하고 시민권을 주장하며 당당히 투쟁하는 새로운 운동 방식이 자리잡았을 뿐만 아니라, 사분오열되어 있던 단체들이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이라는 목표 아래 단결하는 놀라운 성과도 이루어냈다. 그러나 이렇게 성장한 장애인 운동의 흐름 속에서 발달장애를 비롯한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다. 단체마다 탁월한 실력을 갖춘 활동가들이 넘쳐나지만, 대부분 시각, 청각, 지체 등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분들뿐이다 보니, 아무래도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정책에 우선권이 주어지게 된 것도 사실이다. 자신들의 대변자를 갖지 못한 발달장애인들은 장애인 운동 내부에서조차 또 한번의 차별을 받는 이중의 소외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현실에 국회의원들의 무지까지 가세하게 되면, “‘신체’ 장애자 및 질병, 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우리 헌법 제34조 제5항처럼, ‘정신적’ 장애를 헌법의 보호 대상에서 아예 제외해 버린 터무니없는 조문도 만들어지게 된다.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는 별개이며, 정신적 장애 쪽이 더욱 장기적인 지원을 필요로 한다는 상식도 없는 분들이 헌법을 만든 결과다. ‘기쁨터’ 부모님들의 구체적인 질문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직면하고 있는 절박한 문제들은 지체 장애를 가진 분들이 날마다 부닥치는 문제와 차원을 달리하는 것들이다. 엘리베이터나 경사로를 설치하고, 바닥 낮은 버스를 도입하는 것이 지체장애인들에게 필수적인 조처인 만큼, 발달장애인들에게는 일생에 걸친 개별화된 지원이 필요하다. 24시간 365일 근무 중인 발달장애인 가족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단기 보호 서비스를 확대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다. 물론 저 이상한 헌법조항부터 당장 바꾸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데 상대적으로 불리한 발달장애인들의 여건 때문에, 이런 구체적인 필요가 정책에 반영되기 위해서는 가족들의 참여와 연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국의 경우에도 부모와 전문가들이 중심이 된 정신지체시민연합(The Arc) 등이 장애인 운동에 핵심적인 기여를 해왔고, 1990년 장애인법이 만들어질 때는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손버그처럼 정신지체인 자녀를 직접 키워본 부모들이 마지막 뒷심을 보탰다. 우리나라 발달장애인들의 인권도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있는 부모 운동의 성장과 발걸음을 맞추게 될 것이다. 운동에 동참한 선구자의 자녀들이 성장해 감에 따라 조기교육과 통합교육이 단계적으로 정착되고, 그 아이들이 사회에 진출하게 될 때 비로소 독립된 직업과 주거에 기초한 사회 통합도 탄력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개척자 구실을 담당할 장애인 가족들에 대한 정부와 시민, 전문가들의 전폭적인 지원이야말로 발달장애인을 위한 정책 개선의 출발점이다. 김두식 / 한동대 교수·변호사 |
'명품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평]수건 속에 갇힌 피의자 인권 (0) | 2005.12.27 |
---|---|
각자의 소중한 양심을 위하여 (0) | 2005.12.27 |
[시평]연극이 끝난 후 (0) | 2005.12.27 |
[시평] 마초 학교 수강생 모집 (0) | 2005.12.27 |
[시평]마침내 검사와 여고생까지 (0) | 2005.12.26 |